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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 아니, 대침략시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그리고, 모두가 승자일 수는 없다

by 아옌데

大航海時代 대항해시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단어가 아닐까. 이 단어를 듣고 연상되는 이미지는, 위대한 개척정신을 품고 험난한 대양의 파도를 넘어 신항로를 개척해 나가는 용감한 선원들과 선장이 망원경을 들고 먼 수평선을 응시하는 모습처럼 긍정적 이미지만 가득하다. (또는 90년대에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동명의 게임 시리즈를 떠올릴 사람들도 있겠다.)


그러나 15세기에 시작된 대항해시대는, 유럽을 제외한 나머지 대륙의 사람들에게는 이후 무려 600년 가까이 이어지는 약탈, 파괴, 살인, 강간, 납치 등의 인권유린을 동반한 끝없는 전쟁의 서막이었다.


포르투갈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의 동방 원정 함대. 돛에 그려진 붉은 십자가는 그 당시 포르투갈 선박들의 정치적 도구였다.


독실한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바티칸 교황청의 눈치를 보면서 잔인한 식민지 수탈을 어떻게든 정당화할 명분을 필요로 했다. 그들은 뻔뻔하게도 교회를 전면에 내세우며 선박의 돛에 십자군을 의미하는 성당기사단의 붉은 십자가를 그려 넣었다. 로마 가톨릭 신앙을 전 세계에 전파한다는 명목으로 그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교황의 지지를 받기 위함이었다.


오랫동안 이베리아 반도에서 티격태격하느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소모적인 다툼과 경쟁을 완화하고자, 교황이 중재자로 나서서 지구를 반으로 깔끔하게 갈라서 정리해 주었다. 같은 가톨릭 신앙을 공유하는 이웃끼리 더 이상 싸우지 말고 식민지를 사이좋게 나눠먹으라고 허가해 준 것이 바로 토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이다.


진한 부분이 조약에 따라 포르투갈의 영역으로 지정된 곳. 아프리카 전역, 아시아 일부와 브라질이 포함되어 있다.


이 조약에 따라, 브라질을 제외한 아메리카 대륙 전체는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고, 브라질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 대륙 전체는 (서류상으로나마 잠시 동안) 포르투갈의 차지가 되었다. 이는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에서 브라질이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유일한 국가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교황의 위세를 등에 업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기세등등하게 미주, 아프리카, 아시아로 항해하여 수많은 상품들을 강탈하고 유럽으로 가져왔는데, 그중 후추와 계피, 정향과 같은 향신료들은 동일한 무게의 금보다 더 비싸게 팔려나갔다. 큰돈을 벌 수 있는 길이 열리자, 수많은 유럽인들이 목숨을 걸고 항해를 하러 먼바다로 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열 척의 배가 인도로 출항하여 그중 단 한 척이라도 향신료를 가득 싣고 유럽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하기만 한다면 나머지 아홉 척의 배와 선원들을 잃은 금전적 손해보다 더 큰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큰돈을 만질 기회가 없는 가난한 자들이 여기에 목숨을 걸 이유가 충분히 있다고 판단하고 자진해서 배에 올랐다. (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가는 일은, 6백 년 전이나 오늘이나 마찬가지로, 목숨을 담보로 하는 높은 수익을 보장한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함대의 선장을 마치 오늘날의 주식회사 대표와 같이 중장기적으로 투자할 대상으로 보는 주식시장과 주주총회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했. 항해의 성공과 실패에 베팅하는 선물시장, 자기가 가진 자산을 미래의 특정 시점에 팔 수 있는 권리 자체를 매매하는 풋옵션 거래 등등, 오늘날 증권시장에서 볼 수 있는 종 다양하고 복잡한 금융파생상품들이 모두 이때 탄생하였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특성에 따라,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사람의 목숨과 영혼마저 돈으로 환산되어 거래되기 시작했다.


화장실도 못 가도록 결박당한 상태로 선반에 차곡차곡 쌓여서 약 한 달 간의 죽음의 항해를 버텨 간신히 살아남은 흑인들을 기다리는건 가혹한 노예의 삶이었다.


식민지가 세계 곳곳에 생겨나고 농업과 광업, 건설업 등의 노동 집약적 산업이 발달하자, 지주들은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졌다. 소수의 유럽 이민자들로는 충분하지 않자 정복자들은 아프리카로 눈을 돌렸다. 아메리카에서 생산되는 원료들을 유럽에서 팔아 번 돈으로 각종 공산품을 사서 아프리카에서 노예와 맞바꾸고, 노예를 식민지에 판 돈으로 다시 유럽에 팔 원자재를 사는 삼각무역에 너도나도 뛰어들었다. 백인들의 선박이 정박하는 아프리카 해안가에서는 수많은 흑인들이 강제로 사로잡혀 북미, 카리브해, 남미 등지로 팔려나갔다.


당시 이뤄진 삼각 무역의 경로


이 시기에 최소 35만 명, 최대 1,5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무고한 아프리카인들이 더기로 피랍되어 아메리카 대륙으로 팔려갔고, 그 과정에서도 최소 수십만 명이 귀한 목숨을 잃었다. 더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목숨을 잃을수록, 유럽은 더욱더 부유해졌다.


유럽인들이 이처럼 수많은 흑인들을 손쉽게 납치해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 당시 백인들이 노예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일찍이 알아챈 아프리카의 권력자들이 다른 부족들을 납치해서 백인들에게 팔아넘겼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이것이 동족을 팔아먹은 흑인 권력자들의 잘못인 것 마냥 문제를 전가시킨다면 곤란하다. 애초에 유럽인들이 노예를 필요로 하지 않았었더라면, 그리고 그들이 사람의 목숨을 가축보다 더 하찮게 여기지 않았었더라면 이는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비극이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경제적 성공에 자극받은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등의 다른 유럽 국가들도 뒤늦게 황금알을 낳는 식민지 개척에 뛰어들었다. 어마어마한 돈에 눈이 뒤집힌 유럽인들은 전 세계로 뻗어나가 마구잡이로 약탈과 파괴, 협박을 일삼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재산과 생명과 문화재를 침탈했다. 이들은 주로 아메리카에서는 동식물과 귀금속을, 아프리카에서는 사람과 귀금속을, 아시아에서는 향신료와 귀금속을 약탈해갔다.


당연하게도 그 과정에서 상식적이고 신사적인 물물 거래나 맞교환이 있을 리 만무했다. 오직 화약과 칼날이 일방적으로 퍼부어지는 힘의 논리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러나 오로지 고국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패악질은 범죄로 여겨지지조차 않았으며, 오히려 조국의 영웅으로 칭송받기까지 했다.


약 8백만 점의 유물(혹은 장물)을 소장하여, 전부 다 관람하는데 일주일이 걸린다는 영국의 대영박물관


당시 강탈당한 수많은 전리품들은 오늘날까지도 원래 주인들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런던 대영박물관이나 파리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관광지들에 자랑스레 전시되어 있다. 전 세계의 행객들은 유럽인들이 자신들의 조상들로부터 빼앗아간 문화재를 구경하기 위해 관람료를 지불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아무런 위화감 없이 받아들인다. 대항해시대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란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대항해시대는 단지 유럽의 경제성장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14세기에 시작된 르네상스 시대에는 아랍 상인들과 연결된 무역로를 독점한 이탈리아 부호들 위주로 문화, 예술, 철학, 과학 등의 투자와 발전이 이뤄졌지만, 유럽의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16세기에 본격적으로 대항해시대가 열리자 어마어마한 부를 비교적 빠른 시일 내에 축적한 자본가 계급이 생겨났고, 그들이 중세 봉건주의 체제를 무너트리면서 근대 자본시장을 탄생시켰다.


돈 많은 평민(부르주아)들이 왕족과 귀족에게 당해온 차별로 인해 쌓인 불만은 결국 18세기말의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졌다. 군주제의 몰락과 공화국의 탄생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비록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가장 완벽한 사회 체제는 아니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들이 차용하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시스템으로서 큰 의미가 있다.


그리고 한때나마 공식적으로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기록된 적이 있는 조선, 명나라, 일본, 인도차이나,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포르투갈의 영향을 받아서 포어를 공용어 중 하나로 사용하는 동티모르와 한때 포르투갈령이었던 중국의 마카오, 항구도시 캘리컷과 고아를 포르투갈에 강제로 빼앗겼었던 인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포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는 아프리카의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적도기니, 상투메프린시페, 카보베르데, 그리고 남미의 브라질까지 모두 포르투갈 제국주의 야욕의 직간접적인 피해자들이다.


특히 포르투갈이 전수해 준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의해 조선은 건국 이래 최대의 침략이었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었고, 최초로 서양인이 공식적으로 한반도에 입성한 것(일본군 기독교인 부대의 군종이었던 포르투갈인 신부 그레고리우 세스페데스)도 바로 이때였다. 이후 조선은 쇄국정책을 강화하게 되고, 특히 서양 문물을 강하게 거부하여 근대화에 뒤쳐지고 만다.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36년간의 굴욕적인 식민지화였다.




포르투갈 입장에서 보면, 바다 건너의 땅은 기회와 약속의 땅이었다. 아낙네들은 언제 살아 돌아올지 모르는 뱃사람 남편들을 기리면서 구슬픈 전통 노래 파두(Fado)를 불렀다. 포르투갈의 대문호 까몽이스를 비롯한 시인들은 용감한 선원들과 현명한 국왕을 영웅처럼 칭송하는 문학작품을 썼고, 페르디난드 마젤란,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바스코 다 가마 등의 위대한 포르투갈 항해자들은 그들이 벌어온 돈으로 건설된 아름다운 수도원에 안장되는 영광을 얻었다.


리스본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제로니무스 수도원의 모습


백번 양보해서 그들에게는 그것이 자랑스러운 역사일 수도 있겠다. 그 시절을 그리워할 수도 있고, 5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 황금기의 향수를 느끼고 싶어 하는 것도 이해된다. 하지만 그들의 탐욕스러운 항해로 고통받았던 우리 조상들의 피와 눈물로 점철된 그 시대를 여전히 '대항해시대'라는 낭만적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과연 옳을까?


나는 감히 이를 '대침략시대'라고 명명해본다. 최소한 우리 같은 비유럽인의 시각에 더 알맞은 역사인식과 사실관계가 더욱 직관적으로 반영된 명칭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역사의 존재 의의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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