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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옌데 Jun 03. 2021

브라질에도 테스형이 있었다

위대한 축구 선수, 의사, 그리고 민주화 투사의 삶을 살다 간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우리에겐 나훈아가 테스형이라고 부르던 고대 그리스 철학자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브라질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름을 들으면 그리스 철학자보다 이 축구선수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의 풀네임은 소크라테스 브라질레이루 삼빠이우 지 소우자 비에이라 지 올리베이라(Sócrates Brasileiro Sampaio de Souza Vieira de Oliveira). 브라질 발음으로는 -끄라찌스-에 가깝지만, 편의상 소크라테스로 부르겠다.


  한 마디로 그를 정의하자면 가히 불세출의 영웅이라 할 만하다. 비록 한국에서는 그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1954년생인 그는 브라질 국가대표 축구선수동시에 의대를 졸업한 소아과 전문의였다. 선수 생활을 끝 뒤에 의사가 된 게 아니라, 젊은 나이에 의사 자격증을 먼저 따고 나서 본격적으로 프로축구선수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군부독재가 지배하던 80년대 브라질에서 앞장서서 민주화를 이끈 투사이자 사회운동가이기도 했다.


  지식욕이 무척 강했던 그는 말년에 철학 박사 학위까지도 취득했다. 남들은 인생을 서너 번씩 산다 해도 하나도 이루기 힘든 업적을 한 번에 이뤄낸 셈이다. 그래서 '브라질의 다빈치', 또는 '닥터 소크라테스'라는 별명으로도 불다.


  브라질에서 '소크라테스'는 흔치 않은 이름이다. 소크라테스가 태어날 적에, 그의 아버지가 플라톤의 저서 [국가론]을 감명 깊게 읽고는 아들에게 직접  이름을 지어주었다. 소크라테스의 아버지는 의사였고, 고대 문학에도 관심이 많은 학구파였다.


   형제들의 이름은 소포클레스와 소스테네스인데, 모두 그리스 문학에서 따 이름들이다. (브라질에서는 특이한 이름을 가져다 쓰는데 큰 거부감이 없다. 심지어 소크라테스도 자기 아들 이름을 '피델 카스트로'로 지었을 정도다.) 교양 있는 아버지 덕분에, 소크라테스는 어려서부터 고대 문학과 철학을 자연스럽게 접하는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그는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정석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전형적인 기득권층이었다. 유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난 육체적 능력과 지적 능력, 그리고 192cm에 이르는 큰 키까지, 그야말로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이었다.


  신이 그에게 허락해주지 않았던 것은 오직 단 하나, 생긴 얼굴이다. 소크라테스는 엄청난 추남다. 그래서 못생긴 얼굴을 가리기 위해 기른 턱수염과 긴 머리카락이 훗날 그의 이미지를 대표하게 되었다.


  혹자는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조금만 더 잘생겼더라면, 체 게바라처럼 하나의 문화 아이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16살에 상파울루 보타포구 축구클럽의 유소년팀에 입단하면서 축구선수 생활을 시작했지만, 학업에도 뛰어났던 그는 이듬해 브라질 최고 명문대학 상파울루대학교(USP)의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19살이 되던 해, 크라테스의사의 길과 축구선수의 길을 둘 다 포기하지 않기로 결했다. 그로부터 24살에 의대를 졸업할 때까지, 의학 공부축구선수 훈련 함께 병행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학업량이 압도적으로 많은 의과대학 쪽에 축구 훈련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본 상파울루 보타포구 축구팀의 감독은 그에게만 특별 훈련을 제공주었다. 의대를 무사히 졸업하고 소아과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할 때까지 기다려 것이다.


  의로서의 커리어도 놓치지 않으려는 욕심 때문에 축구 선수 경력은 20대 중반에서야 뒤늦게 시작었지만, 그가 축구에 집중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브라질 국가대표로 선발될 만큼 엄청난 축구 실력을 선보였다.


  심지어 그 당시 브라질 대표팀은 전 세계 축구의 정점에 올라있었기 때문에, 국가대표 발탁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축구실력은 이미 커리어 초반부터 월드클래스였다.




  선수로서 그의 경력은 그저 화려한 정도가 아니라, 단연코 축구 역사상 최고 중 하나라고 해도 무방다. 1958년, 1962년, 1970년에 브라질의 3차례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던 전설적인 축구황제 펠레가 국가대표에서 은퇴한 후, 소크라테스는 80년대 브라질 국가대표팀의 전방에서 펠레가 맡았던 플레이메이커 및 주장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계승하 무려 A매치 24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했다.


  하필이면 연승 기록 1982년 스페인 월드컵 8강전에서 이탈리아에게 2-3으로 패하면서 끊긴 것은 너무도 뼈아팠다. 월드컵에서 우승할 절호의 기회와 함께 A매치 최다연승 기록을 아쉽게 놓치긴 했지만, 소크라테스가 이끄는 브라질 대표팀은 여전히 느 나라에게나 공포의 대상이었다.


  지금은 브라질 축구의 위상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금도 여전히 누구나 카나리아 군단을 월드컵에서 마주치기를 바라지 않다. 그건 20세기 내내 수십 년간 이어져왔던 브라질 축구대표팀의 전성기가 남겨놓은 강렬한 아우라 때문이다. 이런 브라질의 80년대 황금기를 책임 주축이 바로 소크라테스였다.



  소크라테스는 7년 동안 국가대표팀에서 22골을 기록했고, 기간 브라질 대표팀은 총 60승을 거뒀다. 등번호 8번을 달고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었던 소크라테스는 192cm의 장신임에도 드리블 속도와 개인기가 무척 뛰어났고, 양발잡이인 데다 몸싸움에도 능해서 거의 완전무결한 선수라 불릴만했다.


  거기에다 큰 키와 넓은 시야, 빠른 판단력을 바탕으로 경기 흐름을 읽고 상비진을 순식간에 뚫어버리는 장거리 패스로 공격 루트를 능숙하게 창조하는 플레이메이커이기도 했다. 그는 축구선수로서 월드컵 우승을 제외한 거의 모든 걸 이뤄냈다. 골을 넣을때 주먹을 하늘로 치켜드는 소크라테스 특유의 골세리머니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남미에서 성공한 축구선수가 대부분 유럽으로 이적하 추세를 무시고 브라질 리그에 계속 남았다. 그가 주요 커리어의 대부분을 보낸 구단은 브라질 상파울루의 명문 클럽 SC Corinthians(이하 코린치앙스)였다.

  이 팀은 창단 때부터 오늘날까지 브라질 민중들에게 일종의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다. 구단의 별명 '민중의 팀'(Time do Povo / People's Team), 오늘날 브라질에서 가장 많은 서포터(약 3천만 명으로 추산)를 가진 축구클럽 중 하나로 손꼽힌다.


  남미에 축구가 처음으로 전파되었던 20세기 초반, 브라질에서는 축구가 오직 엘리트들만의 전유물로 여겨졌었다. 서민들은 축구를 즐기거나 관람할 기회조차 거의 없었다. 이런 세태에 반항하며 1910년도에 상파울루의 가난한 노동자들 몇 명이 모여서 세운 팀이 바로 코린치앙스다.


  누가 봐도 명백한 기득권층 엘리트였음에도 항상 민중들과 어울리며 사회정의 실현에 관심이 많았던 소크라테스가 이 팀을 택한 것도 그 무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1980년대 당시에는 브라질 프로축구리그의 연봉 수준이 유럽 리그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았던 사실도 한몫했다.


  코린치앙스에서의 커리어는 소크라테스 국가적 영웅로 떠오르게 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다. 80년대 브라질의 혼란스러운 시대 영웅의 등장을 갈구하고 있었다.




  1964년,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에서 일어난 군부 쿠데타로 주엉 굴라르 대통령이 실각하고 까스뗄루 브랑꾸 장군이 정권을 잡았다. 브라질에 군부 독재 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그 후 20년 동안 이어진 독재는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 존재했던 유신체제와도 무척 공통점이 많다. 정권 초기에는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그 혜택이 국민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일부 정치 세력들이 독점하게 되면서 점차 브라질 사회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자 군부에서는 3S(Sex, Screen, Sports) 우민화 정책을 내세워 의도적으로 프로축구를 활성화시다. 국민들의 관심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80년대 한국에서도 프로야구, 프로축구가 활성화되고 각종 성인영화와 성인전용극장이 쏟아져나오는 등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같은 시기에 브라질에서는 프로축구리그와 더불어 세계 최대 규모의 축제로 유명한 삼바 카니발, 그리고 거대한 규모의 사행성 업종(복권과 도박 산업)이 국가의 지원에 힘입어 빠르게 성장했다.


  이런 시국에서 코린치앙스 구단의 경영진들은 군부 독재에 이용만 당하는걸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독재 정부에 항거하는 선수들이 이끄는 민주화운동이 1982년부터 3년간 일어났다. 이것이 이른바 코린치앙스 민주주의(Democracia Corinthiana)라고 불린 사회적 저항운동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사회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축구뿐만 아니라 리더십과 사회 공헌 면에서도 명실공히 코린치앙스의 레전드로 자리매김했다.


이기든 지든 항상 민주주의와 함께! 경기를 마치고 슬로건을 치켜든 코린치앙스 선수들


  독재 정부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저항 의식고조되고 있 1978년, 소크라테스는 코린치앙스에 입단하여 첫 해에만 리그에서 20골을 몰아넣으며 단숨에 팀의 에이스자 주장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우민화 정책의 입김이 축구에 강하게 작용하던 현실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독재 정권에 의해 탄압당하던 브라질 국민들에게 진짜 민주주의 정신을 보여주고자 동료 선수들도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도록 설득했다. 당시 코린치앙스 1군 스쿼드의 주축이었던 블라미르 두스 산투스(Wladimir dos Santos), 바우테르 까사그란지(Walter Casagrande), 제 지 소우자(Zenon de Souza) 등의 동료들도 적극적으로 소크라테스와 뜻을 함께 했다.


  그 당시 코린치앙스의 단장을 맡고 있던 사람은 아지우송 몽떼이루 아우베스(Adilson Monteiro Alves)였는데, 원래 그의 본업은 사회학자였다. 아지우송 단장은 소크라테스의 저항 정신에 뜻을 함께 했고,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는 선수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에게 감독에 준하는 전권을 위임하면서, 그가 본격적으로 동료 선수들을 이끌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협조해주었다.


  선수단 운영을 위임받은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의 효용성을 국민들에게 직접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동료 선수들의 훈련 일정이나 식사 메뉴까지도 전부 선수들의 다수결 투표로 결정하도록 건의했고, 이에 반대한다면 자신이 구단과 맺은 계약을 해지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코린치앙스가 구단 운영에 민주적 의사결정 방식을 도입하자 많은 사람들이 비효율적이라며 반대했지만, 소크라테스와 동료 선수들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모두들 이 실험이 실패로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놀랍게도 코린치앙스는 이듬해와 그 다음 해에 연달아 리그 우승을 이뤄내며 민주주의 체계의 효율성을 브라질 국민 모두에게 확실하게 각인시켜주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전국에 생중계되는 축구 경기장 내에서도 민주화 운동을 진행했다. 소크라테스의 주도 하에 코린치앙스 선수들은 등번호 위에 자기 이름이나 스폰서 로고 대신에 민주주의(Democracia)라는 단어를 써넣은  경기를 뛰었다. 당시 민주화에 관심이 없었어도 축구에는 열광했던 대다수의 민중들에게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목숨을 걸고 알리려던 노력의 일환이었다.


  1984년에 직접선거를 촉구하는 전국민적 사회운동(Diretas já! - 지금 당장 직선제를!)벌어지자, 소크라테스는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이 구호를 적은 머리띠를 매고 경기를 뛰기도 했다. 이윽고 독재 정권이 민주화를 위한 전국적인 총파업 운동에 굴복하고 대선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자, 이번에는 투표일의 날짜를 유니폼에 써넣으며 전 국민의 투표 참여를 독려했다.


15일에는 투표하세요!


  축구를 거의 종교처럼 떠받들고 중요시하는 브라질 국민들에게는 소크라테스가 오늘의 경기에 어떤 문구를 고 나올지가 초유의 관심사였다. 그는 군부의 우민화 정책에 악용되던 프로축구를 역으로 이용해서 중에게 민주화 운동을 널리 전파하고 참여를 독려했다.


  당시 브라질 스포츠계 최고의 스타 중 하나였던 소크라테스를 전 국민이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군부정권에서도 의 돌출 행동을 쉽사리 제재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군부는 눈엣가시와도 같았던 그를 지속적으로 압박고, 결국 1985년에 소크라테스는 쫓겨나듯이 이탈리아 ACF 피오렌티나로 반강제로 이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본인이 원해서 한 이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ACF 피오렌티나 구단 내에서 동료 및 운영진들과 많은 불화를 일으켰다. 심지어 그는 특유의 반골 기질을 발휘하여 이탈리아 프로축구 내부의 각종 비리와 문제점들을 들춰내며 공론화하기도 했다.


  피오렌티나 구단의 경영진 및 팀 동료들과 계속해서 마찰을 빚던 중, 때마침 그 해에 브라질에서 군부 정권이 국민투표에서 패배하며 마침내 20년 간의 독재를 끝내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뒤이어 국민들이 염원하던 문민정부가 들어섰고, 그 덕분에 소크라테스불편한 유럽 이적 생활을 단 한 시즌만에 정리하고 즉시 브라질로 돌아왔다. 그는 결코 조국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타고난 반골이었다. 전문의 자격증을 가진 의사였지만, 정작 자신의 몸은 전혀 돌보지 않항상 술과 담배와 여자에 병적으로 집착했다. 한창 전성기였던 선수 시절에도 그는 하루에 담배를 3갑씩 피워대는 헤비 스모커였을 뿐만 아니라, 하프타임 도중에도 술을 들이켜던 알 중독자였다. 독재와 맞서 싸우기 위해 독재자처럼 굴었던, 모순으로 점철된 그의 삶은 항상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기 일쑤였다.


  남들의 시선이나 불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자신만의 방식으로 바로잡으려 노력했지만, 종종 자신의 재능과 인기를 앞세워 전횡을 일삼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뛰어난 력이 이런 단점들을 상쇄시켰고, 남들보다 두세 배 이상 노력해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업적을 남겼기에 그는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으로 기억될 수 있었다.


말년의 소크라테스의 모습


  이탈리아에서 브라질로 돌아온 이후부터 그의 커리어는 조금씩 내리막길을 걸었다. AC플라멩구 구단에 입단하고 86년 멕시코 월드컵에 국가대표로 출전했지만, 프랑스와 8강전에서 승부차기를 실축해 패배하며 자신의 마지막 월드컵 우승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렸다. 그 이후 1989년에 선수생활 은퇴를 선언했고, 몇몇 구단에서 감독으로 활동했지만 별다른 업적은 남기지 못했다.


  그 대신 축구 외의 분야들에서 활발 활동을 벌였다. 음반 녹음 작업에 참여하기도 고, 직접 연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1992년에는 스포츠 클리닉을 개원해서 의사로 활동했고, 정치권에 출마를 시도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선수 시절부터 평생 내려놓지 않았던 술과 담배는 결국 그의 발목을 붙잡고야 말았다.




  2011년 12월 4일 오전, 소크라테스는 식중독 증세로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그러나 뒤이은 장출혈로 인한 쇼크를 그는 끝내 이겨내지 못했다. 80년대 브라질 축구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소크라테스는 겨우 56세라는 한창때의 나이로 을 마감했다.


  그날 저녁, 브라질 전국리그 우승 확정할 중요한 경기 앞두고 있던 코린치앙스 선수들과 팬들에게도 그가 사망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경기 시작  모든 코린치앙스 선수들과 3천만 명의 서포터들, 그리고 그를 사랑했던 모든 브라질 축구 팬들은 생전 소크라테스가 자주 하던, 주먹을 꽉 쥔 손을 허공에 쳐드는 골 세리머니를 하며 그의 생애를 기렸다.


  그날 밤 코린치앙스는 이벌 구단 빠우메이라스와 피말리는 접전 끝에 무승부를 거두며, 어이 브라질 전국리그 통산 5번째 우승을 이뤄냈다. 그리고 클럽의 레전드이자 민주화 영웅이었던 소크라테스의 영전에 우승컵을 헌정했다.


  살아생전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인생을 살아낸 닥터 소크라테스, 그가 남긴 말 한 마디가 그의 인생 전체를 대변다.


  “더 나아진 조국에 내 골을 바치리라.(Give my goals to a better cou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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