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9세기 초,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일으킨 전쟁이 유럽 대륙을 무참하게 휩쓸었던 시대였다.
서유럽 전체가 몇 년 만에 통째로 나폴레옹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오로지 섬나라 영국만이 강력한 해군이 버티는 도버 해협을 최후의 보루로 삼아서 버티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트라팔가 해전(1805년 10월 21일)에서 영국의 호레이쇼 넬슨 제독에게 역사적인 대패를 당했고, 어떻게든 복수를 하려고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하지만 해상전에서 연달아 패배하며 영국을 정복하는데 실패하자, 결국 극단적인 자충수를 택했다. 유럽 대륙 전체에 영국과의 모든 교류를 끊을 것을 명한 것이다. 이른바 1806년의 '대륙 봉쇄령'이었다.
그 당시 영국이 대외무역에 크게 의존하는 나라였던 점을 감안하면 무역로를 전면 차단해서 경제를 무너트려 스스로 항복하게 만든다는 전략이 적절해보였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매우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북해-대서양-지중해 중개무역의 중심이었던 영국과의 교역이 하루아침에 모두 끊어지자,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한 다른 유럽 국가들은 영국을 대체할 무역로를 찾지 못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나폴레옹에 대한 반감만 더욱 부추기는 역효과를 낳았다. 게다가 유럽 대륙 서쪽의 기나긴 해안선 전체를 프랑스군이 완벽하게 통제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영국에 경제적 의존이 심했던 포르투갈은 대륙 봉쇄령을 어길 수밖에 없었다. 영국 국적의 상선이 몰래 포르투갈의 항구를 드나든다는 첩보를 접하고 격노한 나폴레옹은 군대를 보내어 포르투갈을 응징하라는 명을 내렸다. 유럽 최강의 프랑스군이 리스본으로 진군해온다는 소식을 접한 포르투갈 왕실은 말 그대로 발칵 뒤집어졌다.
(이 와중에 약삭빠른 스페인은 이 상황을 이용해서 나폴레옹과 서둘러 퐁텐블로 조약(1807년)을 맺었다. 이 조약을 통해 스페인은 프랑스군에게 길을 터주는 대가로 포르투갈 땅의 일부를 차지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이 스페인을 싫어할 이유를 깨알같이 하나 추가한 셈이다.)
당시 포르투갈의 여왕이었던 도나 마리아 1세(Dona Maria I)가 안타깝게도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아들인 동 주엉 드 브라간사(Dom João de Bragança) 왕자가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여왕 탓에 나라 분위기가 뒤숭숭하던 와중에 프랑스의 침공까지 맞닥뜨리게 되자, 리스본 왕궁에서는 프랑스군에 항복하자는 의견과 해외로 대피하여 후일을 도모하자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주엉 왕자는 국외 피난이야말로 모두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유일한 방법이라 판단했고, 포르투갈의 역사에 길이 남을 결단을 내렸다. 모든 왕족들을 비롯하여 왕궁의 신하들과 하인들, 그리고 그들의 식솔들까지 모조리 배에 태워서 대서양을 건너 식민지 브라질로 도망치기로 결정했다.
수백 년의 역사와 정통성을 가진 나라의 국왕이 수도를 버리기로 결정한 건 상황이 그만큼 급박했기 때문이었다. 조선 왕실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탓에 두 차례나 한양 도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르는 비극을 겪었던 상황과 비슷했다. 포르투갈 왕실의 존폐가 걸린 상황인지라 이것저것 따지고 있을 계제가 아니었다.
피난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리스본 항구의 큰 배들을 모두 징발하고도 모자라서 영국에 급히 도움을 청해 갤리선 몇 척을 더 빌려왔다. 수십여 척의 크고 작은 선박들에 왕실의 보물과 몇 주치의 식량, 그리고 무려 15,000명에 달하는 왕족들, 신하들과 그들의 식솔을 급하게 싣고서 브라질을 향해 부랴부랴 출항했다.
브라질로 떠나기 위해 승선 준비를 하는 포르투갈 왕족과 가신들의 모습, 작가 미상
일부 역사가들은 그 당시 리스본 인구의 약 8%에 해당하는 1만 5천 명과, 왕실의 온갖 보물과 미술품들, 수많은 동식물들, 그리고 어마어마한 양의 식량 등을 겨우 보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준비기간 내에 모두 싣고서 출항했다는 기록에 의구심을 감추지 못한다. 승선자들의 수가 과장되게 부풀려진 건 아닌지, 또는 왕실이 오래 전부터 비밀리에 브라질 피난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합리적 의심을 제기한다.
일설에 의하면 포르투갈 왕실에서는 이보다 훨씬 전부터 더 효율적인 식민지 관리와 영토 확장을 위해 브라질로 수도를 옮기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도 한다. 다만 한 나라의 왕궁을 옮기는 천도는 어마어마한 자금과 시간이 투입되기 때문에 쉽게 결정할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어쩌면 나폴레옹의 침공이 오랫동안 머뭇거리던 천도 계획에 급격히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여하튼, 영국이 빌려준 배 4척을 포함한 총 16척의 대형 선박에는 왕족과 귀족들이 올라탔고, 나머지 식솔들은 30여 척의 크고 작은 배들에 나눠 탔다. 총 사십여 척이 넘는 왕실의 대선단이 리스본을 떠난 날은 1807년 11월 29일이었다.
원래는 11월 27일에 짐을 다 싣고 28일에 출항하려 했으나, 갑자기 남풍이 불어오는 탓에 남쪽으로 항해하기가 어려워졌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풍향이 바뀌기를 기다렸지만 야속하게도 바람의 방향은 하루 종일 바뀌지 않았고, 나폴레옹의 군대가 시시각각 다가온다는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발만 동동 구를 수 밖에 없었다. 천만다행으로 그 다음 날인 11월 29일에 비로소 풍향이 바뀌었고, 그 덕분에 간신히 출항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이 보낸 2만 6천 명의 기병 군단이 리스본 항구에 도달한 때는 바로 11월 30일 오전 9시였다. 딱 하루 차이로 포르투갈 왕족들 전체를 한꺼번에 손쉽게 사로잡을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영화보다도 더 아슬아슬하게, 운명의 여신은 포르투갈 왕실의 명맥을 유지하는 편을 택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들 하지만, 만일 이때 리스본 왕실이 피난에 실패했었더라면 이후 포르투갈과 브라질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국왕이 떠난 리스본에서는 스스로 무장을 해제한 수비병들이 직접 성문을 열어서 나폴레옹의 군대를 순순히 맞이했다. 주엉 왕자는 프랑스 군대가 리스본에 쳐들어오는 즉시 항복할 것을 군사들에게 미리 명령해두었다. 이는 무척 현명한 처사였다. 프랑스군은 굳이 무의미한 살육을 벌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텅 빈 왕궁을 손쉽게 접수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렇게 포르투갈 왕실은 나폴레옹의 손아귀에서 가까스로 벗어났지만, 항해에 전혀 익숙지 않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장기간의 항해를 잘 버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비록 영국 해군의 호위를 받긴 했지만, 출항한 지 얼마 안 되어 폭풍우를 만나는 바람에 선단이 뿔뿔이 흩어질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한편 배 안에서는 벼룩과 이, 그리고 각종 질병들이 창궐했다. 여자들은 머리카락 속에 숨어든 이를 잡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긴 머리를 모두 빡빡 밀어야 했다. 게다가 식량과 식수까지 바닥나면서 극심한 기아와 뱃멀미에 시달렸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왕실의 대선단은 출항한 지 무려 54일이 지난 1808년 1월 22일, 대서양의 포르투갈령 마데이라 섬을 거쳐 마침내 브라질 바이아(Bahia) 지방의 사우바도르(Salvador) 시에 기항하는 데 성공했다. 그곳에서 잠시 머물며 재정비를 한 후, 3월 8일에 드디어 최종 목적지인 히우 지 자네이루(Rio de Janeiro) 항구에 다다를 수 있었다.
여담으로, 이때 벼룩과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머리를 밀어버린 여자들이 쓸 모자가 없어서 대신 천조각을 머리에 둘둘 말아서 터번처럼 썼는데, 사우바도르 주민들이 그걸 보고 유럽의 최신 유행인 줄로 오해하여 따라 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바이아 지방의 여성들이 전통 의상을 입을 때 머리에 터번을 두르는 풍습으로 남아있다.
바이아 주의 여성들이 쓰는 터번은 아랍권이나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주엉 왕자는 브라질을 기존의 식민지에서 포르투갈과 동급의 '왕국의 정식 영토'로 격상시킴과 동시에, 히우 지 자네이루를 수도로 정하고 새로운 왕궁을 건설할 것을 명했다. 그와 더불어 브라질 국군(상비군)을 새로이 창설하고, 브라질 은행(Banco do Brasil)을 설립하고, 대학과 공장을 짓도록 허가하고, 항구를 외국에 개방할 것을 명하는 등 브라질에 독립국가의 기틀을 세워 나갔다.
하지만 브라질 현지 주민들에게는 별로 좋을 게 없었다. 생활이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잦은 징용과 수탈에 시달려야만 했다. 운이 나쁜 몇몇 농장주들은 아무런 죄도 없이 단지 국왕이 머물 곳을 필요로 한다는 이유만으로 집과 땅을 강제로 압류당하기도 했다.
브라질로 피난을 결정한 포르투갈 왕자 동 주엉 드 브라간사(동 주엉 6세)
브라질로 천도한 지 8년이 지나 1816년에 '매드 퀸' 마리아 1세가 사망하자, 주엉 왕자는 정식으로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연합 왕국의 국왕 '동 주엉 6세(Dom João VI)'로 즉위하였다. (알가르브는 오늘날 휴양지로 유명한 포르투갈 최남단 해안 지방의 이름으로, 그 당시에는 포르투갈의 자치령이었다.)
시간이 흘러 유럽에서는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이 몰락했고, 프랑스의 압제에서 벗어난 포르투갈에서는 그에게 본국으로 돌아오기를 수 차례 종용했다. 동 주엉 6세는 마지못해 자신의 넷째 아들인 페드로 왕자에게 브라질의 부왕(총독) 자리를 맡기고 1821년에 본국으로 귀환했다. 이것이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잃게 만든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브라질의 총독이 된 페드로 왕자는 생각보다 야망이 큰 인물이었고, 동시에 귀도 얇았다.
브라질에는 3백 년간 식민지화가 진행되면서 현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귀족들이 많았다. 까보끌루(caboclo)라고 불리던 그들은 비록 귀족 가문의 혈통이었지만, 아프리카 흑인 노예 또는 아메리카 인디오와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유럽 출신의 백인 귀족들에게 온갖 차별과 멸시를 당하고 있었다. 게다가 브라질 총독부가 부과하는 막대한 양의 세금 때문에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브라질을 대리 통치하던 페드로 왕자는 아버지인 동 주엉 6세가 사사건건 브라질 내정에 참견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게다가 형인 미겔 왕자가 브라질 총독 자리를 노린 탓에 여러 차례 위협을 당하기도 했다. 까보끌루 귀족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페드로 왕자에게 브라질을 독립시켜서 스스로 국왕의 자리에 오르라고 열심히 설득했다. 총독이 아닌 국왕의 지위를 원했던 페드로 왕자는 오랫동안 고심한 끝에 결국 이 제안을 수락하고야 말았다.
독립 아니면 죽음을 달라!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하는 동 페드로 1세. Pedro Américo, 유화, 1888년 作
1822년 9월 7일, 마침내 페드로 왕자는 본국에 반기를 들어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하고 자신이 직접 왕위에 올랐다. 브라질이 드디어 진정한 독립국의 지위를 얻게 되고, 동 페드로 1세(Dom Pedro I)가 통치하는 브라질 왕국(Império do Brasil)이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사실 동 페드로 1세는 위의 그림과 같은 웅장한 독립선언을 실제로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역사에는 어느 정도 미화가 필요한 순간들이 종종 있는 법이다.)
브라질의 독립 과정을 잘 살펴보면, (브라질 국민들의 자발적인 독립운동과 독립의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자력으로 독립을 쟁취한 게 아니라, 지배국 포르투갈의 왕자가 스스로 브라질을 독립시켰다. 시몬 볼리바르와 산 마르틴 같은 독립영웅들과 함께 오랜 전쟁을 통해 스페인으로부터 자유를 직접 쟁취한 다른 남미 국가들에 비해서 어이없을 정도로 허무한 독립이었다.
일제 강점기의 우리나라로 예를 들어보면 일본제국의 왕자가 조선에 총독으로 와있다가 갑자기 변심을 해서 조선을 일본으로부터 독립시키고 스스로 조선의 왕이 되어버린 거나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식민지의 독립이란 피지배국의 격렬한 저항과 자립의 염원을 통해 이뤄지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브라질에서는 지배국의 왕족이 직접 식민지의 독립을 주도하는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지배국의 통치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가장 큰 해외 식민지를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포르투갈은 그 후 계속해서 국운이 쇠퇴하여 오늘날에는 유럽의 변방국가 중 하나로 전락해버렸다. 반면 브라질은 명실상부한 독립국이 되어 훗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두 나라의 운명은 또 어떻게 흘러갔을지, 만일 1807년에 나폴레옹의 군대가 하루만 더 일찍 리스본에 도착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역사의 방향이란 도무지 예측할 길이 없다.
P.S.
브라질이 식민지였을 때 세금 명목으로 수탈해온 황금의 상당량은 아직도 여전히 포르투갈에 남아있다. 현재 전 세계 GDP 순위 48위에 불과한 포르투갈의 금괴 보유량은 세계 16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그 총량은 무려 382톤에 달한다. 오늘날 시가로는 약 200억 유로의 가치로 환산되며, 인구 1천만의 포르투갈 국내 총생산량의 10%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다.
참고로 GDP로는 12위를 기록 중인 대한민국의 금 보유량은 대략 100톤이 약간 넘는 정도로, 세계 35위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자고로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조상을 잘 만나야 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