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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옌데 Oct 17. 2020

대서양 너머에 깃발을 꽂다

포르투갈의 유일한 남미 식민지, 브라질 - 1

  브라질이 남미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나라라는 사실만 봐도 이 포르투갈이 세운 식민지였음을 쉽게  수 있다. 하지만 브라질에서 식민지가 어떤 방식으로 세워졌고, 또 떻게 독립했는지까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늘 단 두 편의 글로 깔끔하게 정리해본다.




  포르투갈이 스페인과 한창 대항해시대(혹은 대침략시대)를 열어가던 15세기 말, 두 나라의 탐험가들은 서로 먼저 이국 땅에 자기 깃발을 꽂는 경쟁을 벌였다. 원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양국의 선원들은 감정싸움을 넘어서는 무력 충돌도 마다하지 않았다. 식민지 확장 과정에서 소모적인 충돌이 계속 이어지자, 독실한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양측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최상위 권위자인 바티칸 교황청을 찾아가 중재를 요청했다.


  그리하여 1493년, 교황 알렉상드르 6세는 칙령을 통해 적당한 절충안을 제안했다. 프랑스령 카보베르데 섬으로부터 서쪽으로 100 레구아(약 480km) 지점을 기준으로 대서양 한복판에 남북으로 직선을 그어서 동쪽 땅은 모두 포르투갈이, 서쪽 땅은 스페인이 차지하라고 제안하는 1차 협의안이 도출되었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국왕 동 주엉 2세(Dom João II) 이 제안에 불만을 제기했고, 이듬해에 기준선을 370 레구아(약 1,500km) 지점으로 옮기면서 양국이 모두 만족할만한 합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조약은 스페인령 토르데시야스 섬에서 조인되어 토르데시야스 조약이라고 다.



  이로써 잠시나마 대서양 서쪽의 아메리카 대륙은 스페인의 차지가 되었고, 대서양 동쪽에 위치한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 대륙 전체가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른바, 해가 지지 않는 '大포르투갈 제국'이 세워지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물론 이 제국은 문서상으로만 존재했고, 겨우 100년도 지나지 않아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등 다른 국가들이 식민지 개척에 뛰어들면서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유명무실해짐과 동시에 세계사에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적어도 유럽의 공식 서류상으로는 15세기부터 16세기까지 조선, 왜국, 중국, 인도, 동남아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 전체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셈이다.


  16세기 말에 조선에서 발발한 임진왜란에서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왜군의 군종 자격으로 참여했던 것도, 알고 보면 1493년에 로마 바티칸의 교황이 대서양 지도 한가운데에 선을 하나 그었을 때부터 시작된 나비효과의 결과였다.




  하지만 조약 체결 이후에도 포르투갈 혹시나 새로운 땅이 발견되지 않을까 하여 끊임없이 스페인령 아메리카 대서양 주변을 집적거렸다. 운 좋게도, 1500년 4월 22일에 포르투갈의 탐험가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Pedro Álvares Cabral)이 공식적으로는 유럽인 최초로 남미 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당시 알려진 지도상에 표시되어 있던 북미와 카리브해의 모든 땅들은 공식적으로 스페인 차지였으므로, 카브랄이 이끄는 포르투갈 선카리브보다 훨씬 더 남쪽으로 우회하다가 남미 대륙스페인보다 먼저 상륙하게 된 것이다.


1500년에 브라질의 포르투 세구루로 상륙하는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 Oscar Pereira da Silva, 유화, 1900년 作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하면 그 땅은 카보베르데로부터 370 레구아 떨어진 기준선보다 더 동쪽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포르투갈이 합법적으로 점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스페인 입장에서는 아메리카 대륙의 일부를 포르투갈에게 빼앗긴 셈인지라 이를 갈며 분했다. 하지만 1506년에 교황 율리우스 2세가 370 레구아의 기준선을 다시 한번 재가함으로써  땅이 포르투갈의 소유임을 공식화했다. 이쯤되면 다들 눈치챘겠지만, 바로  땅이 오늘날의 브라질이다.




  드넓은 대서양을 무사히 건너서 최초로 브라질 땅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포르투갈 입장에서는 대단한 업적었지만, 처음엔 카브랄 제독 본인조차도 자기가 발견한 남미 땅이 유럽 전체보다 몇 배나 더 넓은 거대한 대륙이라고 미처 생각 못했다.


  그는 이 땅을 '떼하 드 베라 크루즈' (Terra de Vera Cruz: '진실된 십자가의 땅'이라는 뜻)라고 임시로 명명하고, 이를  마누엘 1세(Dom Manuel I) 국왕에게 보고했다. 바야흐로 포르투갈의 남미 식민지 개척 시대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포르투갈 탐험가들은 새로운 땅에서 돈이 될만한 것이 없는지 한참 뒤져본 끝에, 어떤 나무를 톱으로 베면 마치 피같이 새빨간 수액이 흘러나오는 걸 발견했다. 그 당시 붉은색 염료는 구하기 어려워서 가격이 꽤 높은 편이었다. 그래서 초기의 개척자들은 이 나무를 잔뜩 베어다가 본국 포르투갈로 가져가서 팔았고, 이 나무 브라질 나무(Pau-brasil) 이름을 붙였다.


브라질 나무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수액. 브라질의 첫 수출품이었다.


  Pau는 포르투갈어로 '나무'를 뜻하고, Brasil은 '불꽃의 색깔', '붉은색'을 뜻하는 라틴어 brasilia에서 유래했다. 자연스레 사람들은 브라질 나무가 많이 나는  땅을 '브라질'이라 부르게 되었다. 열정의 나라 불리는 브라질은 그 이름부터 뜨거운 불꽃을 상징하고 있는 셈이다.




  포르투갈은 다른 유럽 열강들에 비해 땅덩이도 작고 인구도 적었다. 그래서 바다 건너 브라질의 광활한 영토에 심하게 집착했다. 더욱이 브라질 땅에서는 파면 팔수록 어마어마한 양의 금은보화가 튀어나왔다. 브라질에서 대규모의 금광과 은광이 발견되었다는 유럽에 사실이 알려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남미로 달려갔다. 브라질의 골드러시였다.


  포르투갈이 세운 브라질 총독부에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막대한 세금을 부과해서 민지 브라질에서 생산된 귀금속들을 유럽으로 싹쓸이해갔다. 처음엔 황금 생산량의 1/5을 세금으로 가져갔는데, 물론 이것도 적지 않은 세율이었지만 그래도 80%를 자기 몫으로 가져갈 수 있다는 데에 메리트를 느낀 많은 유럽인들이 꺼이 대서양을 건너 브라질로 몰려들었다. 금을 캐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자, 지표면에 노출되어 채굴이 비교적 쉬웠던 금광은 이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포르투갈 본국에서는 금 생산량이 줄어든 이후에도 이전과 같은 양의 금괴상납하기를 요구했다. 나중에는 사람들이 으로 이를 도저히 납부할 수가 없어서 세간살이까지 팔아 세금을 내기에 이르렀다. 금광 하나만 믿고 목숨 걸고 머나먼 타지에 와서 고된 육체노동으로 번 재산의 대부분을 총독부에게 강탈당한 주민들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고, 독립에 대한 열망이 이주민들 사이에서 움트기 시작했다.


  지만 브라질의 독립은 쉽지 않았다. 이주민들 중 일부가 포르투갈 출신이긴 했지만, 그 밖에도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 등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아프리카 노예 및 남미 인디오들과 함께 뒤섞여있었다. 당연히 이들을 하나로 묶어줄 단일 국가의식이나 소속감, 애국심 등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이들은 포르투갈 정부의 지나친 수탈에 대한 반감 구심점으로 삼아서 하나의 독립된 국가를 구축려 했지만, 수많은 독립 시도들은 줄곧 실패만을 거듭했다. 결국 브라질은 약 3백여 년 간 포르투갈의 수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갑자기, 19세기 초 유럽에서 브라질의 운명을 뒤바꾼 초대형 사건이 일어났다.



-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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