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월지 FEARLESS 5호 - 당신의 새벽은 어떠신가요?
저 멀리서 동이 터온다. 새벽이 끝나가고 마침내 아침이 다가오고 있다. 창가의 커튼에 조금씩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하고, 이윽고 밝고 따뜻한 빛으로 바뀐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밤새 거의 움직이지 않았던 온몸의 근육들을 하나하나 깨우며 쭈우욱 길게 기지개를 켜본다. 우두둑, 온몸의 관절들과 근육들이 제각기 소리 없는 외마디 비명을 질러댄다. 밤새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해일처럼 밀려온다. 프리랜서의 삶이란 이런 것인가. 나는 침대로 몸을 던져 기절하고 만다. 눈을 떠보니 이미 한낮의 늦은 오후다. 부은 눈을 비비며 일어나 늦은 점심을 챙겨 먹는다.
이것이 보통 밤을 꼬박 새워 신나게 게임을 한 후의 내 모습이다. 퇴사할 땐 분명히 성공한 프리랜서를 꿈꾸었다. 게임 대신 일에 밤새 치여 이 한 몸 하얗게 불태워 일하고서 하룻밤에 백만 원씩 벌고 일주일씩 팡팡 노는 게 내 꿈이었는데, 현실은 아무도 몰라주는 게임 레벨만 잔뜩 올리고 있다니. 게임에 모든걸 다 바치고 난 후의 이 피곤함, 이 공허한 성취감, 아마 누구나 다들 한 번쯤은 겪어봤을 테지. 나만 그런 거 아니지? 아니었으면 좋겠다, 정말.
호기롭게 회사를 때려치우고 프리랜서를 선언한 직후, 이런 밤낮이 바뀐 생활을 거의 반년이나 계속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예전에 회사를 다니는 동안, 거의 3년 동안 연차도 못 쓰고 추가수당도 없이 야근에 시달렸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도무지 두 다리로 제대로 걷질 못했다. 몸이 더 이상 견뎌내지 못했던 거다. 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바로 그날 사직서를 쓰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도 심각하게 악화되었던 건강은 퇴사를 하자마자 일주일 만에 거짓말처럼 깨끗하게 회복되어 버렸다. 이 정도면 내가 생각해 봐도 그냥 꾀병이 아니었던 걸까 싶을 정도였다. 나 자신도 어이가 없었다. 여러분, 퇴사는 만병통치약이에요. 고정수입 상실이라는 심각한 부작용이 있지만. 아무튼 이제 건강도 회복되었겠다, 몇 년 간 차곡차곡 월급도 모아 놨겠다, 보상심리로 그동안 못했던 게임을 한번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잠시 PC 전원을 켰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계절이 두 번 바뀌어 있었다. 그 6개월 동안 나는 햇빛 알레르기 환자보다 더 햇님과 서먹한 관계로 지냈다.
그때 내게 새벽은 광란의 시간이었다.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으며, 또 아무도 내게 신경 쓰지 않았다. 원룸, 백수, 그리고 50인치 모니터. 이 셋의 강력한 조합은 당신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폭발적인 시너지를 발휘해 내는 저력이 있다. 나의 새벽에 세상은 잠들어 있고, 내가 잠들면 세상은 움직인다. 마치 서울에서 나 홀로 지구 반대편의 부에노스아이레스 기준 시간대 UTC-03:00을 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새벽은 내게 놀이터와도 같다. 생산적이고 건설적이라고 평가할 만한 활동을 새벽에 해 본 적은 드물다. 하지만 세상에 놀이터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건축가가 학교나 아파트를 지을 때 놀이터를 만들지 않는다면 커리어에 치명타가 될 정도로, 놀이터는 중대사안이다. 놀이터에서는 놀아야 한다. 완벽하게 놀기 위해 준비된 시공간이 나에게는 바로 새벽이라는 시간이다. 이제 프리랜서로 상당히 자리를 잡은 지금도 나는 가급적이면 새벽까지 밤을 새워 일하지는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새벽에 깨어있어야 한다면 그건 놀기 위해서여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새벽에 열리는 프리미어리그 경기 시청도, 독서도, 게임도 새벽이라서 집중력이 높아지는 요인이 분명히 있다.
그러니 호모 루덴스들이여, 부디 가끔은 새벽에 놀길 바란다. 그리고 오후 늦게까지 푹 주무시길. 그래도 될 정도의 충분한 시간과 건강과 재력의 여유가 지금 여기서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임할지어다. 에이-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