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런던까지, 유로터널 버스 여행
야간 버스를 탔다. 쾰른으로, 브뤼셀로, 유럽 곳곳으로 국경을 넘어가는 버스가 줄지어 서있었다. 다시 여행자가 된 기분에 빠졌다. 배낭을 메고 헐렁한 옷을 입은 여행자들이 곳곳에 보였다. 여행과 자유의 공기였다. 버스에 올라 곧 잠이 들었다. 버스 안 전등도 전부 꺼졌다. 편안한 자세를 찾아 이쪽저쪽으로 몸을 돌렸다. 가슴 근육이 뭉쳐 아팠다. 이러다 아프면 육로 여행의 아름다움은 그저 고통으로 변할 뿐이다. 그런 생각 속에서도 잠이 들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 국경을 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프랑스어를 쓰는 버스 기사가 프랑스 억양의 부드러운 영어로 여기에서 모두 내려 입국 검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릴 때 모든 짐도 가지고 내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베개로 쓰던 스카프를 작은 가방에 넣고 밖으로 나갔다. 짐칸에서 배낭을 꺼내 매고 출입국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시아 여행자인 나에게 유독 많은 질문을 할 것 같아 미리 서둘러 심사대 앞으로 갔다. 할 수 있는 한 빨리 끝내고 버스로 돌아가고 싶었다. 젊은 여자가 나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리로 오라는 것이었다.
-영국에는 왜 가죠?
가족을 만나러 가요.
-한국에서는 무슨 일을 했죠?
주로 파트타임 일을 했어요. 짧게 일하고 지금처럼 곧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귤 농장 같은( 순간 내가 일했던 제주도의 귤 밭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게 직업인 가요?
직업이라기엔 그렇지만 그렇게 살아요.
-만나러 간다는 가족은 역시 한국인인가요?
아니요. 영국인이에요.
-얼마나 머물 생각이죠?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표가 있나요?
사실 저희는 어디로 언제 갈지 몰라요. 다만, 6개월을 넘기진 않을 거예요.
여자가 서명을 하라며 종이를 건넸다.
답변 불충분이라는 문장에 표시가 돼 있었다.
- 미안하지만 당신에게 더 구체적인 질문을 해야 해요. 당신은 지금 관광 무비자로 국경을 넘고 있는데 가족을 만나러 가는 것은 다른 문제니까요. 버스는 미리 떠날 거예요. 남겨놓고 내린 게 있나요?
버스가 미리 간다고요? 남겨놓은 건 없어요.
-좋아요. 그럼 저쪽으로 가서 저 하얀 옷을 입은 남자의 지시를 따라주세요.
남자는 내 배낭을 하얀 철창이 있는 곳에 둔 후 나를 불렀다.
-이쪽 사무실로 와요. 주머니에 있는 걸 다 꺼내 주세요. 하나도 빠짐없이. 어디 아픈 곳이 있나요? 무기? 마약 가진 것 있어요?
아니요. 전혀요.
-그럼 여기서 두 손을 들고 서세요. 지금 당신의 몸을 검사합니다.
장갑 낀 남자의 손이 내 등과 어깨 가슴과 무릎을 쳤다.
-뒤로 돌아요.
그의 손이 등을 쓸고 내려왔다. 그는 고무장갑을 벗었다. 길게 늘어진 고무가 탁하고 소리를 냈다.
-좋아요. 이쪽 사무실로 와서 앉아 있어요. 물, 커피, 스낵, 편할 대로 들어요.
나는 사무실에 앉았다. 두 잔의 물을 마셨다. 한쪽 코너에는 내 몸을 수색한 남자와 또 다른 중년의 여자가 앉아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마음을 가라앉혔다. 심하게 긴장이 되거나 걱정되지는 않았다. 결국 모든 게 괜찮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앉아 있었다. 다만, 예약해놓은 아침 아홉 시 버스를 놓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다시 그 젊은 여자가 들어왔다. 배낭을 검사하겠다고 했다.
-영어에 문제없죠?
네.
-짐은 당신이 싼 게 맞나요?
네.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고 있죠?
네.
-지금부터 배낭에 든 것을 다 꺼내야 해요.
여자가 배낭을 열었다. 옷을 넣은 주머니가 먼저 나왔다. 옷을 펼쳐 손으로 툭툭 쳤다. 작은 책을 들고 '이건 뭐죠?' 하고 물었다.
국제 운전 면허증이에요. 여자가 작은 책을 내쪽으로 놓았다.
-제가 본 것은 다시 집어넣어도 좋아요.
옷과 스카프, '지구별 여행자'와 여권 가방이 여자의 손을 거쳐 차례로 내게로 넘어왔다. 차분히 차곡차곡 작은 가방에 그것들을 넣었다.
-이건 비행기푠가요?
네. 폴란드 슈체친행. 두 달 후예요. 그 표를 쓸지는 확실히 몰라요.
-더 든 게 없나요?
아니요. 아직 든 게 있어요. 여기 주머니에 미니 가방. 카자흐스탄 항공의 선물이었어요.
여자가 주머니를 열었다가 닫았다.
-좋아요. 다시 다 담아도 좋아요. 저기에 짐을 놓고 다시 얼마간을 기다리세요. 직원이 당신의 지문을 채취하러 올 거예요.
사무실에 다시 앉았다. 몸을 수색했던 남자는 앉은 자세로 꾸벅꾸벅 잠을 자고 있었다. 문신을 그린 팔이 움직임 없이 의자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추위를 느꼈다. 그리고 이 모든 게 꿈 같이 느껴졌다. 지문을 채취한다던 사람은 오지 않았고 또다시 그 젊은 여자가 왔다.
-저를 따라와요. 더 물어볼 게 있어요.
또 다른 사무실이었다. 이 방에는 커튼이 있고 창이 있었다. 찬바람이 들어왔다. 고개를 창 쪽으로 돌리자 여자가 재빨리 '창문 닫아 줄까요?' 하고 물었다.
네.
여자가 창문의 저쪽을 내가 창문의 이쪽을 잡아당겼다. 여자가 작은 기자용 수첩을 꺼내 묻기 시작했다.
-다시 물을 게요. 무슨 일을 해 돈을 벌죠?
저는 7년 동안 여행했어요. 여행을 위해서 예를 들면 농장 같은, 자연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일했어요. 그리고 그 돈으로 6개월 혹은 1년 동안 여행하고요.
-관광비자로 일 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죠? 영국에서 쓸 돈은 충분히 있나요?
네.
- 한국에 가족은 있나요?
네. 엄마와 형 누나 셋 그리고 조카 여덟 명이 있어요.
-당신에겐 배우자와 아기가 있다고 했는데 왜 그들과 함께 여행하지 않았죠?
저희는 한국에서 6개월 정도 있었어요. 가족도 만나고 출생신고, 혼인신고 같은 것도 하고요. 배우자와 아기는 2주 전에 먼저 영국으로 왔어요.
-좋아요. 영국에 가면 6개월 이상 있을 수 없다는 것. 일을 할 수 없다는 것 다시 말할게요. 더 할 말이 있나요?
아니요. 다만, 제 인생과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시간이었어요.
-좋아요. 이제 이 노트를 제 보스에게 줄 거고 그가 당신이 갈 수 있는지를 결정할 거예요. 만약 노라면 당신은 프랑스에 남아 다음 일을 스스로 결정해야 해요. 알겠죠?
알았어요. 나는 다시 사무실로 가 기다리게 되었다. 곧 다시 여자가 들어왔다. 여자는 함박웃음을 띠고 있었다.
-당신의 가족에게로 가도 좋아요.
우리 직원이 당신이 탈 수 있는 버스를 구해 줄 거예요. 오렌지색 형광 옷을 입은 여자가 다가왔다.
-프랑스어? 아니면 영어를 하나요?
영어요.
-무슨 버스를 타고 왔죠?
플릭스 버스요.
-이번엔 저기 저 유로라인을 타고 갈게요. 버스기사에겐 우리가 말해놨어요.
입국심사를 마친 다른 버스의 여행자들이 다 타고 나는 마지막에 탈 예정이었다. 어둠 속에서 이 버스를 탔던 모든 여행자가 입국 심사를 다 마치고 나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프랑스 칼레 어딘가에 있다는 난민 캠프가 어디쯤일까 생각했다.
입국 심사를 맡았던 젊은 여자가 웃으며 나에게 왔다.
-아기에게 가게 돼서 좋나요?
나는 눈물을 흘렸다.
-다른 나라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모든 영국인의 문제죠. 다 함께 항상 행복하길 빌어요. 당신의 여행 이야기를 더 듣고 싶지만 이만 안녕할게요.
여자의 웃는 눈과 내 눈이 잠깐 마주쳤다. 난 그녀가 국경에서 일하는 마음의 어려움을 나에게 토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세계 여행자인 내 눈을 느끼고 나를 멈춰 세웠던 건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저쪽에서는 두 마리의 토끼가 국경 따위 상관없다는 듯이 자유롭게 뛰고 있었다.
형광 옷의 여자가 나에게로 걸어왔다.
-플릭스 버스가 왔어요. 저걸로 바꿔 타기로 해요. 당신이 타고 온 회사의 버스니까요.
버스 뒷자리를 찾아 앉았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