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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an 04. 2017

책의 마을 헤이 온 와이

둥근 모자의 남자

그는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비가 쏟아지는 밤이었다. 헤이 온 와이의 밤은 놀랍도록 조용했고 또 깜깜했다. 하늘에서는 작은 얼음 알갱이마저  떨어졌다. 자전거 핸들을 잡은 내 손은 그대로 영원히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친구 집에서 40 킬로미터 가량을 자전거로  달려 그곳에 닿았다. 이미 파리에서 이스탄불까지 달린 경험이 있으니 이 정도 거리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친구의 가족을 안심시켰다. 2차선의 길은 두 대의 차가 겹치면 완전히 찰 정도로 좁았고 운전자들은 자전거 위의 유별난 아시아 여행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행자는 그들의 눈의 움직임을 느꼈고 그때마다 그저 살며시 미소 지었다.


나는 길 가의 나무가 좋았고 들판이 좋았고 정성 들여 지은 영국의 시골 집들이 좋았다. 영국에 머문 지 한 달째, 비로소 영국의 자연이 내 호흡 안으로 천천히 흡수됐다. 호흡은 차츰 온기를 뿜었고, 몸은 따뜻해졌다. 들판이 은은하게 아름다웠고, 나는 이 풍경처럼 내 마음이 초록빛을 띠고 있다고 느꼈다.


책의 마을로 유명한 그곳은 북러버라면 누구나 한 번쯤 꼭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었다. 세 시간 가량 페달을 굴려 드디어  헤이 온 와이에 닿았다. 친구는 버스를 타고 가라고 했지만, 난 현대의 당나귀! 자전거를 타고 조금은 특별하게 그곳에 닿고 싶었다.


헤이 온 와이에서 나는 그저 눈인사로 스쳐가는 관계를 열고 닫았다. 책의 마을 역시 고요하게 그저 평범한 영국의 시골 마을 풍경으로 멀리서 온 여행자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통나무 골격이 드러난 하얀 벽의 헌책방,

책을 끼고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남자의 벽화가 있는 책방,

책을 고르고 통에 돈을 넣고 가는 정직 책방,

호러, 스릴러만 있는 책방,

시집만 있는 책방,

미술과 음악에 관한 책방.

어디에나 책과 책 여행자가 보였다.


헌책방 구석구석을 누벼 다섯 권의 책을 골랐다.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1파운드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  1파운드

파트뤼크 쥐스퀸트 <향수 > 역시 1파운드

니코스 카잔자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1파운드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파운드

내가 사랑하는 책들이 가방에 고이 자리 잡았다.

책방에 주저앉아 시간을 잊고, 책을 골라 값을 치르고, 가방에 든 책을 느끼며 가슴 설레고, 집으로 돌아 가 책을 펼칠 시간을 기다리는 북러버의 의식을 차례로 치른 것이다.

난 보석점을 찾았고, 오래되어 끊어진 내 시곗줄을 새것으로 바꿀 곳이 바로 이곳이라고 느꼈다. 여주인은 굳이 돈을 받지 않았고 나는 태국인처럼 두 손을 모아 감사를 표했다.


동화 같은 오후 한 때를 보내고 자전거를 세워 둔 곳으로 갔을 때, 어쩐 일인지 열쇠가 보이지 않았다.

열쇠를 엮어 놓은 빨간 터키 지갑도 깜쪽같이 사라졌다. 불과 오후 다섯 시가 지났는데 하늘은 까만 색종이처럼 어두웠다.

지갑은 잃어버렸고,

자전거는 가로등에 묶여 있고,

마지막 버스는 코 앞에서 떠났고,

눈 앞은 깜깜했다.


덩치 큰 철물점 직원이 자물쇠를 끊어 주었다. 줄 것이 이것밖에 없다며 책 한 권을 꺼내 주자 그는 받지 않았다.

"이 마을 전체가 책인걸요. 책을 벽돌로 써서 성을 지을 수 있는 곳이 이곳이에요. 그 책은 당신의 성을 짓는데 쓰도록 해요. 도움을 줄 수 있어서 즐거웠어요."

자전거 위에 올랐을 때 또 거짓말처럼 비가 쏟아졌다. 5000킬로미터의 자전거 여행 중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계속되는 삐걱거림. 아, 영국. 그리고 헤이 온 와이! 이곳이 먼 나라에서 온 북러버에게 어떤 비밀 의식을 선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구슬 같은 빗방울이 매서운 크리스탈을 품고 얼굴을 때렸고, 옷은 곧 다 젖었다. 난 어서 이 의식의 다음 단계로 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오늘의 모험을 회상하고 싶었다.

자전거에 전등을 달아 올 생각은 미처 못했고, 빌려 온 전화기에 든 친구의 전화번호는 다 닳은 배터리와 함께 사라졌다.


차들은 차갑게 스쳐갔다. 까만 밤 속을 자전거를 타고 미친 듯 달리는 남자를 보고 저 앞에 차가 섰다. 그러나 곧 엔진 소리를 뿜고 다시 멀어져 갔다. 차에 탄 이가 궁금증과 걱정을 가지고 브레이크를 밟았다가 혹시 벌어질지 모르는 어떤 불길한 상황을 예감하며 다시 엑셀레이터를 밟는 순간을 나는 상상했다.


이대로 40킬로미터를 달려갈 수는 없었다. 나는 거센 빗방울을 헤쳐 다시 책의 마을로 돌아갔고,  불이 켜진 집의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 무슨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 같은 참담한 상황이란 말인가. 멍하니 서서 비를 맞으며 오늘의 이 운명적 어려움에 짙은 한 숨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둥근 모자를 눌러쓴 신사가 마법처럼 내 눈 앞을 스쳐갔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 저는 사우스 코리아에서 온 여행자예요. 헤레 포드에 있는 친구의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지갑도 전화번호도  잃어버렸어요. 이곳 어딘가 제가 하룻밤을 묶고 나중에 돈을 지불할 만한 곳이 있을까요?"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내 특유의 영어를 인내심 있게 다 듣고 표정 없이 답했다.

" 잠깐 기다려 봐요." 그는 왔던 길을 되돌아 갔다. 광대한 시간이 지났고 내 턱은 덜덜덜 떨렸다. 마침내 그가 돌아왔다.

" 여기서 잠깐 기다리면 택시가 올 거예요. 그걸 타고 가도록 해요."

그리고 내 손에 지폐가 전해졌다.

" 그 돈이면 충분할 거예요. "

난 그저 고맙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막의 오아시스, 목마른 자에게 한 모금 물을 선물한 그는 내 짧은 감사 인사를 듣고 살며시 미소 지으며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곧 대형 택시가 내 앞에 섰다. 기사가 짐칸에 자전거를 실었다. 내가 사우스 코리아에서 왔다고 하자 택시기사는 노스 코리아의 김 누군가가 친척을 총살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의 말이 나를 불편하게 했지만, 내 마음에는 책 마을 둥근 모자 신사의 친절함이 온 가슴을 덥혀 주고 있었다. 나는 이 하루를 영원히 기억하게 될 거라고 느꼈다. 자전거 여행과 다섯 권의 고전, 신비로운 신사의 친절과 언제 갚게 될지 모르는 80파운드의 기억이 영원의 바퀴처럼 의식의 허공을 돌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친구는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느라 애썼고, 나 역시 하루의 긴긴 여행을 따뜻한 커피 한 모금 한 모금에 담아 삼켰다. 친구는 사우스 코리아의 시인 '고은'의 평화에 대한 시낭송을 들었다고 했고, 난 택시 기사가 말했던 노스 코리아에 대한 소식을 떠올리며 또 한 모금의 커피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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