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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기 May 30. 2024

분노, 내 덕질의 뿌리

나의 길고 얕은 에바 덕질

맑고 빨간 물이 흰 거품을 일으키며 기어 들어온다. 파도 소리인가? 무심하게 반복되는 파도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저 빨간 물은 바다다. 


파도 소리 위에 풀벌레 소리가 겹친다. 벌레 소리에 어울리는 초록이 산을 뒤덮고 있다. 바다의 빨강과 산의 녹음이 마찰하는 곳에 매미 울음이 쇳소리처럼 카랑하다. 해변에 닿은 산자락 도로에 탱크가 줄지어 서 있다. 쇳덩이처럼 무겁게 짙어진 녹음이 바다로 대포를 향하고 있는 탱크를 덮고 있다. 녹음이 탱크의 입을 막고 있고 적막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붉은 바다는 산의 능선까지 높은 건물들을 밀어 올려놓았다. 건물들은 푸석하게 말라죽은 나무처럼 붉은 산에 꽂혀있다. 누가 죽어서 저렇게 피를 많이 흘렸을까? 산의 절반을 다 뒤덮은 빨강에 하얀 선이 인간의 모양을 만들고 있지만 인간은 저렇게 크지 않다. 산에 비하면, 색깔에 비하면, 피에 비하면 인간은 너무 작다. 


마을에는 인적이 하나도 없다. 차도 한 대 다니지 않는 텅 빈 도로에 흐릿한 소녀가 서 있다. 소녀의 바다처럼 빨간 눈동자가 반짝이다 사라졌다. 쿵! 저 먼 곳에서 먹먹한 굉음이 들려왔다. 커다란 파동이 머리 위의 전깃줄을 흔들었다. 전깃줄이 휙휙 허공을 채찍질했다. 길거리 상점의 닫힌 셔터 문이 흔들렸다. 산에 가려져 있던 수십 대의 전투기가 파란 하늘로 스윽 들어왔다. 산 너머에서 쿵 쿵 소리가 가까워졌다. 곧이어 키가 산보다 큰 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3사도 출현! 사도는 붉은 달 같은 것을 가슴에 박고 있었다. 전투기가 발사한 미사일이 공중에서 둥그렇게 발광하며 터진다. 사도의 팔에서 분홍빛 창이 튀어나와 전투기를 피격했다. 전투기는 전깃줄을 끊으며 건물 구석으로 추락했다. 거대 생명체에 비해서 전투기도 건물도 작았다. 하물며 인간은 너무 작았다. 사도는 온몸으로 붉게 발광하며 공중으로 떴다. 전투기와 건물들이 산산이 바스러지며 거대한 빛 속으로 사라졌다. 


화가 났다. 매일 답답한 세상에 화가 났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바‘라고도 함)’을 좋아하게 된 힘의 원천은 화였던 것 같다. 내가 가진 분노에 비하면 이 세상은 너무 작았다. 할아버지가 누워있는 방도 그 옆에 있는 하물며 내 몸뚱이는 너무 보잘것없이 작았다. 


에반게리온은 아주 컸다. 사도 또한 아주 컸다. 괴물 사도(使徒)가 쳐들어와서 미래 도시를 모두 파괴해 버리는 게 좋았다. 거대한 에반게리온이 폭주해서 그 괴물을 터트려버리는 게 좋았다. 이놈의 세상이든 저놈의 괴물이든 모조리 다 파괴되는 게 내가 원하는 바였다. 다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늘 방구석에 처박혀 있어야 하던 시기였다. 서드임팩트는 인류의 진화지만 또 멸망이었으므로 그런 멸망이 좋겠다는 생각을... 안 했다면 거짓말이다.


다큐멘터리 '에바로드'(2013)를 만든 박현복은 MBC 예능프로그램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게스트로 나와서,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에반게리온의 세계관을 그냥 한마디로 "로봇이 있고, 로봇을 타기 싫은 주인공과 로봇에 태우려는 아빠와의 갈등, 네, 막장드라마예요."라고 간단하게 일축해서 설명한다. “사람의 내면에 관한 이야기예요.”라고.


화가 쌓인 나의 내면으로 키운 에바덕력은 그리 활발하거나 심오하지도 않았다. 인류보완계획이 뭔지 이해 못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애니캐릭터를 모에화 하며 좋아하는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모에화는 귀엽지만 모든 인물을 비슷한 스타일로 만들어버리는 게 오히려 난 무서웠다. 온라인상 덕후 커뮤니티나 동호회모임도 하지 않았다. 애니메이션의 뒷이야기나 2차 제작물을 열성적으로 수집한 것도 아니었다. 피규어를 좀 좋아했지만 아이가 장난감 가지고 노는 수준이었다. 원작을 보기 위해 일본어를 마스터하거나 전 세계 애니박람회를 돌며 스탬프 랠리를 완주한 덕후에 비하면 내 덕력은 방구석을 벗어나지도 못한다.


20여 년 전 좋아하기 시작한 에반게리온은 현재 가끔씩 넷플릭스에서 에바시리즈를 보고, 옛날옛날 시리즈온에서 결제하고 다운로드한 다큐멘터리 ‘에바로드’가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고, 장강명의 소설 ‘열광금지, 에바로드’를 읽었고,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아서 낡아빠진 피규어가 하나 있는 정도다.


힘겨운 시기에 방구석에서 시작한 덕질이라 그런지 업무가 마감에 가까워지거나 야근의 연속으로 치닫게 되면 아직도 책상 구석에서 에바를 찾게 된다. 깊지는 않지만 길게 가는 덕력이다. 제의를 치르듯 모니터 위에 피규어를 세워놓고 에바영상을 틀어놓고 일을 한다. 내게 에바란 폭주를 갈망하는 울부짖음 같은 것이다. 젊고 놀고 싶을 때 할아버지의 병시중 때문에 마음대로 나가지 못하는 답답한 마음의 내가 냉정한 아버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타기 싫은 로봇을 타야만 했던 신지에게 공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시뻘겋게 (피는 아니지만) 피범벅이 되어서 ‘구오오오오!’ 괴성을 내며 폭주하는 에바를 보면서 후련함을 느꼈다. 도시의 하늘을 다 덮을 정도로 거대한 사도가 와서 도시를 파괴해 버리는 그 스케일감이 좋았다. 죽음과 멸망을 향한 욕망이었다. 그것은 곧 어떤 새로운 시작을 향한 탈출구를 원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20여 년째 죽고 싶을 때면, 뭔가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면 에반게리온을 찾는다.


바로 ‘레’의 욕망이다. (아야나미 ‘레이’는 에반게리온 ‘0호기’를 타는 주인공이고 ‘레’는 일본어로 ‘0’이다. 영혼 령(靈)이기도 하다.)


그런 덕질이 '연남 임팩트',  '엔드오브연남(EOY)'라는 두 권의 사진집을 독립출판으로 만들게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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