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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바람 Apr 26. 2018

09. 말이 말이 아니라니까

진짜 중요한 건 ‘통’하였는가였다

두 돌이 지날 무렵, 아무래도 준영이가 다른 아이들과 다른 것 같다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순둥순둥 잘 먹고 잘 싸고, 잘 노는 아이였지만 지나치게 조용했고 (혼자서도 너무 잘 놀았고) 빠빠이, 끄덕끄덕, 죔죔, 곤지곤지 등 아이들이 어릴 때 주로 하는 모방 동작을 거의 따라 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말을 잘 하지 않았다.

"준영이가 일반 아이들과 조금 다른 것 같아. 말도 잘 못하고 병원에 가봐야겠어"
"남자애들은 다 좀 느려. 그리고 말도 하잖아 발음도 정확한데 뭐가 이상해"
"아니 그건 말이 아니라니까"

‘언어’란 의사소통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음성이나 문자기호뿐 아니라 억양, 몸짓, 표정 등을 포함한 것이 넓은 의미의 언어라고 할 때,  준영이가 하는 말은 단순한 소리 모방일 뿐이었다.  자전거가 지나가면 '자전거'라고 하고, 딸기를 먹으면 '딸기'라고 말하지만 거기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지 않았다.  단순히 특정한 발음을 반복적으로 따라 하며 재미있어할 뿐이었고, 모방하는 언어도 제한적이었다.

 대학 시절 수업시간에 배웠던 의사소통에 관한 실험 영상도 생각났다. 소리를 제거하고 사람의 표정이나 몸짓만 봤을 때와 억양을 제거하고 소리만 들었을 때의 의미 전달에 관한 영상이었는데 비언어적인 표현이 의사소통에 얼마나 중요한 지를 설명하는 영상이었다. 의사소통에서 음성언어가 차지하는 비율은 30%도 되지 않는다. 우리가

외국어를 잘 하지 않아도 해외여행을 가서 눈치껏 먹고 놀고 다닐 수 있는 이유다. 예능 프로에서 백일섭 할아버지는 한국어로, 호텔 직원은 스위스어로 큰 제약 없이 대화하는 것만 봐도 분위기, 표정, 몸짓 등의 비언어적 소통방식이 얼마나 대화에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만약 어린아이가 과자봉지를 들고 와서 엄마 눈을 보며 '음음음음' 이라고 한다면 엄마는 바로 과자가 먹고 싶구나 하고 알 수 있다. 하지만, 과자봉지를 보고서 '과자'라고 무표정하게 말하는 준영이는 과자를 꺼내 주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휙 다른 곳으로 지나쳐갔다. 자신이 말을 하고도 상대의 반응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소리를 따라 낼 수 있는가와 없는가는 내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리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도 아이의 마음을 읽기는 어려웠고 딱히 원하는 것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정신과 상담을 가겠다는 거야?"

 이제는 인식이 많이 좋아져서 마음의 병이 생기면 정신과를 가야 한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정신과 치료는 터부시 되고 부끄러운 일로 여겨진다. 처음 정신과에 가보겠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는 재활의학과를 가는 게 낫지 않느냐, F코드를 받으면 보험처리도 어렵고 나중에 직장 구하기도 어렵지 않느냐 등의 조언을 했다.

 마음이 아픈 아이를 데리고 정신과 상담을 가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만약 이를 두고 수군거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수준이 낮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남의 눈치까지 챙겨볼 여력이 없었다. 일단 병원에 가 봐서 괜찮다고 하면 다행이고, 문제가 있다면 하루빨리 치료를 받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엄마인 나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발달의 곡선을 천천히 따라가는 것과 그 곡선의 궤도를 이탈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그러니까 내 아이는 단순히 조금 느린 게 아니라는 것을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판단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익숙한 분을 찾아가려고 방송이나 책으로 접한 의사를 추려서 연락해보니 소아정신과가 많지 않아서인지 대기가 6개월이었다. (지금은 1년이라고 한다) 기다리는 동안 더 열심히 아이와 놀아주면서 부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결과를 받기를 기대했지만, 첫 진료를 받은 이후 지금까지 아이는 여전히 다양한 치료를 받고 있다. 다른 아이들이 말을 시작할 때 발화를 시작했던 아이의 언어발달이 이렇게 느릴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모든 과정에는 다 순서가 있는 법이었다.  하루아침에 훌쩍 발달과정을 뛰어넘지는 않았다. 잘 기지도 않고 뒤집기도 별로 하지 않았던 아이의 운동능력이 차츰 발달하고, 놀이 참여를 즐거워하고 타인에 대한 관심과 표정이 풍부해지는 게 먼저였다. 조금씩 기초발달이 밑에서부터 쌓여가니 말을 하지 않아도 준영이의 마음과 생각을 이해하는 게 수월해졌다. 그 때문인지 요즘은 오랜 시간 정체기였던 언어 표현도 조금씩 늘어가는 기분이다. 물론 지난 7년간 고통스럽게 했던 아이의 수면장애가 좋아져서 드디어 잠을 잘 자게 된 엄마의 평온한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말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마음을 표현하는 것
표정만 봐도 아이의 언어를 들을 수 있다. ‘먹기 싫어요’   ‘이 옷 이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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