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란바람 May 12. 2018

12.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도움을 준다는 것

“나는 늙어서 손주들 안 돌봐줄 거야”  

 자유로운 노년을 꿈꾸던 친정엄마는 연이은 딸의 슬픔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나의 특별한 육아에 동참하게 됐다. 젊은 사람도 아이를 돌보는 일이 힘에 부칠 때가 많은데, 친정엄마에게 타잔처럼 뛰어노는 아들을 맡기는 게 늘 미안하고 감사했다.

하지만, 염치없이 내가 눈을 부릅뜨고 앙칼지게 ‘엄마!!!’ 를 외치게 만드는 순간이 있는데 그건 바로 아이가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도와주려고 할 때다.  할머니 마음에는 서투른 동작으로 옷을 입고, 양말을 신고 있는 손주를 보는 것이 안쓰럽고 답답하기도 해서 무의식적으로 손길이 가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도와주지 말라는 강한 신호를 보낸다.  

서투르기 때문에 더 많은 기회가 필요해요

 출근 준비로 등교 준비로 서로 바쁜 아침, 아이 스스로 밥을 먹고, 옷을 입고 학교 갈 준비를 하게 하는 것은 대단한 인내를 필요로 한다. 양말 한번 신으려면 전등 쳐다보고, 옆에 있는 물건도 스윽 잡아보고 3초 이상 집중을 못하고 꾸물거리는 아이를 기다려주고, 촉진하다 보면 스트레스가 쌓일 때도 많다. 차라리 내가 도와주면 훨씬 빨리 편하게 하고 나올 텐데 속은 타들어가면서도 얼굴은 부자연스럽게 웃으며 ‘자, 천정 보지 말고 여기 양말을 보면서 발을 넣어야지~’ 하다 보면 사리가 생길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도 언제까지 아이 뒤를 따라다니면서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을 대신해줄 수는 없기 때문에, 조금씩 아이가 해나갈 수 있도록 반복해서 알려주고 기다려주고 연습을 시킨다. 그러다 보면 잘 하지 못할 때는 아이도 하기 싫어서 함흥차사였던 일을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면 재빠르게 척척 해내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그럴 때마다 '아, 멈춰있는 듯해도 이만큼 컸구나' 하고 기특하고 신기하다.

 때로 컨디션이 안 좋거나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면 ‘도와주세요’라고 표현하도록 알려주고 도움을 받고 나면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도록 가르쳐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요즘에는 오히려 내가 아이에게 다양한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  

식사를 준비하면서 반찬 뚜껑을 열어달라거나, 쓰레기를 버려달라거나 엄마가 너무 피곤한데 양말을 벗겨달라거나 등등 스스로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이런저런 부탁을 하고 아이가 들어주면 고맙다고 표현해준다.

 이렇게 아이가 내 말을 이해하고 도움을 주기까지는 정말 쉽지 않았다. 다섯 살 때만 해도 수용 언어가 너무 낮아서 의사마저도 검사 결과에 대해 말하기를 망설였다.

“아. 결과가 왜 이렇게 나왔지. 이렇게 낮을 것 같지는 않은데…” 하면서 엄마인 내 눈치를 너무 봐서 “괜찮습니다. 알고 있으니 편하게 말씀하세요”라고 오히려 의사를 다독여줄 만큼  언어 이해력이 부족했던 아이였다.   

 다섯 살 아이를 돌쟁이 대하듯 언어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는 되도록 짧고 분명하게 말하고, 지속적으로 모델링을 하면서 연습했다.

 예를 들면 반찬 뚜껑을 열면서  “반찬. 뚜껑. 열어요”를 수없이 반복하다 보면 아이가 그 말을 이해하는 순간이 왔고, 조금씩 말이 들리기 시작하는지 요즘은 제법 잘 알아들어서 놀랄 때가 많다. 그리고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부모가 진심으로 기뻐하면 아이도 그 순간 뿌듯함을 느끼는 듯 환하게 웃었다.

 그래서 요즘은 좀 더 범위를 다양하게 확장해서 도움을 청하고, 아이가 이해를 못하는 것 같으면 함께 동작을 하면서 수행을 한다. 눈 앞에 있는 할머니한테 물건을 주는 것은 할 수 있지만, 방 안에 있는 할머니를 찾아서 물건을 가져다주라는 지시어는 이해를 잘 못하기 때문에 같이 손을 잡고 할머니를 찾아서 드리면서 설명해주는 식으로 언어이해를 확장해나가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는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 도움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
-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면 감사해야 한다는 것  
- 너 또한 다른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다는 것


 장애가 있더라도 얼마든지 타인을 도울 수 있다. 도움을 주는 것이 물리적인 부분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장애가 있는 누군가의 아름다운 연주, 따스한 색감이 있는 그림, 멋진 글을 보고 마음의 위로를 받는 경우도 많고 존재만으로 희망이 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종종 시각장애가 있는 분들에게 마사지를 받기도 하고, 발달장애 바리스타 청년들이 건네는 커피와 반가운 인사를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은 도움을 받기만 하고 다른 한쪽은 도움을 주기만 하는 관계는 건강하게 오래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일상에서 서로 다양한 방식으로  물리적, 정신적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음에도 우리는 종종 '장애인=도움을 줘야 하는 대상=불쌍한 사람'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결혼 전, 나는 봉사동호회 활동을 했었다. 한 번은 그룹홈에 사는 아이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준비했는데, 아이들에게 갖고 싶은 선물을 물어보니 전문 미술용품, 자전거, 불빛 나오는 운동화 등 너무 구체적이어서 놀란 적이 있다. 속으로 '나도 어렸을 때 부모님한테 받지 못한 선물을 달라고 하네?' 하며 조금 불편한 마음이 있었지만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니까 하고 준비했다. 아이들이 말해준 10여 개의 선물을 준비해서 찾아간 날, 원장님의 말씀은 나를 반성하게 했고, 지금까지도 그 날의 일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지금까지 어떤 기업도, 어떤 봉사자도 아이들이 무엇을 가지고 싶은 지 물어본 적이 없었어요. 덕분에 아이들과 갖고 싶은 선물을 이야기하면서 아이들의 꿈, 바람에 대해서 희망찬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되어서 행복했습니다. 지금도 스케치북, 과자, 색연필 같은 물품들은 후원이 많이 들어와서 넘치거든요"

 도움을 받는 사람은 도움을 주는 사람보다 어려워야 한다는 생각, 그러니까 도움을 받는 사람은 무엇을 받든 무조건 고마워해야 한다는 생각, 내가 그동안 도움을 준다는 것, 봉사와 나눔에 대해 얼마나 ‘갑’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깨달았고 잠시나마 불편하게 생각했던 내가 너무도 부끄럽고 미안했다.


 장애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지, 아무것도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장애가 있든 없든 우리는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고, 또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장애=도움받는 사람이란 기울어진 프레임을 벗어나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공감이 생기면 좋겠다. 그래야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동행-함께 살아가기’가 가능해지지 않을까

우리가 진짜 원하는 건 ‘동행’





매거진의 이전글 11. 노는 건 질 수 없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