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란바람 Apr 25. 2018

07. 못하는 게 아니라 천천히 배우는 거예요

10번, 100번 그래도 안되면 1,000번의 연습

“자, 여기 빨간 토마토랑 빨간 사과가 있어. 이 토마토는 무슨 색일까?”

“파란색”

“잘 봐봐~~ 이건 빨간 토마토, 이건 빨간 사과야~자, 이 토마토는 무슨 색이라고 했지?”

“노란색”


끙-온갖 집 안에 색이 있는 물건을 모아서 설명하고, 시도 때도 없이 물감놀이를 하며 색을 가르친 지 몇 년째, 여전히 엉뚱한 대답을 하는 아이를 마주한다. 하지만 걱정을 하지는 않는다. 이제는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빨간 사과’라고 대답해 줄 날이 올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처음 치료를 시작할 때, 준영이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2조각짜리 꼬마 퍼즐도 맞추지 못했고, 아기들이 좋아한다는 블록이나 다양한 촉감놀이 등 그 무엇에도 흥미가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몇 개의 단어를 말하기는 했지만 알려주는 말은 전혀 따라 하지 않았고, 과자나 동영상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무엇인가를 익히고 배우는 것, 세상 밖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은 고역이었다. 치료사들로부터 시선 맞춤과 시지각 집중이 너무 안 된다는 평가를 들은 터라 내 마음은 초조했지만 늘 아이의 눈은 허공을 향해 있었다.

 매일 밤마다 아이가 잠 들고나면 각종 심리학 책, ABA프로그램(응용행동분석), 왼쪽 뇌를 깨어주세요 같은 특수교육관련된 책을 읽었고 다양한 논문과 동영상 자료를 찾아 공부를 시작했다.

몇 권은 나눠주고 없지만 밤마다 읽던 책들
 아... 어떻게 하면 아이를 잘 가르칠 수 있을까?

다양한 교수법 중 눈에 띄는 것은 ABA와 고속학습법과 몸놀이의 중요성이었다. 특히 ABA는 자폐를 검색하면 미국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권하는 치료 매뉴얼이기 때문에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인 교육이기도 하다.

 UCLA의 로바스라는 심리학자가 처음으로 ABA로 자폐아들을 주당 40시간 2년 이상 가르쳤더니 47%의 아이가 일반학교에 갈 정도로 인지능력과 언어능력이 향상되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적어도 주당 25시간 이상을 받도록 권고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국내에서 ABA치료를 할 수 있는 전문가는 손에 꼽힐 만큼 적어서 주당 20시간 이상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기관은 드물었다. 여기저기 알아보던 차에, 아는 엄마의 소개로 집 근처에 치료실을 개원한 소장님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소장님께서 엄마가 함께 할 수 있는 오픈형 수업을 해주셔서 직접 보며 다양한 팁을 얻었고, 각 종 동영상과 책을 참고해서 내 아이만을 위한 교육 매뉴얼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렵고 복잡한 이론이 많았지만 내가 공부한 다양한 교수법을 종합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점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랬다.


-아이가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최소 단위로 학습단계를 나눌 것 (분절학습)

-수행하지 못할 경우 촉진을 하며 성공경험을 줄 것

-집중력이 짧으니 교육시간은 한 번에 짧게, 자주 할 것

-수행했을 경우 물질적/정신적으로 아이가 좋아하는 적절한 보상을 할 것 (긍정적 행동 강화)

-몸이 발달해야 뇌가 발달하고, 잘 놀아야 학습능력도 올라간다는 것


 알맞은 목표 설정과 지원, 적절한 보상을 주어 역량을 강화하는 것은 일을 하든 공부를 하든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동기부여 방식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엄마표 특수교육이라는 게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 중 가장 와 닿은 방법은 ‘분절(수준별) 학습’과 ‘촉진이었다. 쉽게 말하면 아이의 수준에 맞춰서 수행할 수 있을 만큼 과정을 잘라서 습득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이가 퍼즐의 원리를 잘 이해 못한다고 하면 4조각의 퍼즐 중 3조각을 미리 맞춰놓고 아이로 하여금 나머지 한 조각을 맞추게 한다. 그런데 남은 한 조각도 맞추는 방법을 몰라하면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려 빈자리에 넣으면 된다는 촉진(힌트)을 준다. 아이가 반응해서 빈 조각을 완성하면 진심으로 기뻐해 주고 좋아하는 강화물을 준다. 아이가 방법을 이해한 듯하면 힌트를 주지 않고 혼자서 채울 수 있도록 하고, 서서히 빈 조각의 개수를 늘리고, 그다음에는 퍼즐 전체를 완성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집중시간이 짧은 아이가 따분해하지 않도록 한 번에 짧은 시간을 하되, 시행하는 횟수를 늘리고 즐겁게 참여하도록 하니 어느샌가 아이가 퍼즐의 원리를 깨달았다. 이렇게 해서 준영이는 이제 밑그림도 없는 30피스 퍼즐을 금방 맞추고는 자신 있는 표정을 짓는 아이가 되었다. 모든 학습의 밑바탕은 즐거움이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퍼즐뿐 아니라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블록을 주면 소근육 발달이 느린 준영이는 단 하나도 끼우지 못해 그냥 와르르 쏟아놓고는 던지며 놀기만을 반복했다. 소근육 향상을 위해 우리 집에는 사각 블록, 아기 블록, 소프트 블록, 자석 블록, 브릭스 블록 등 형태와 재질, 크기가 다양한 블록이 넘쳐났다. 블록 끼우기도 마찬가지로 먼저 내가 살짝 끼워놓은 다음 아이로 하여금 조금만 눌러도 끼워지도록 하고 “와 이렇게 어려운 걸 해냈다! “ 고 진심을 다해 칭찬했고, 하나씩 블록의 개수를 늘려나갔다. 지금은 아직 정교한 모양을 따라 만들기는 못하지만 혼자서 요리조리 돌려가며 새로운 모양을 창조해낸다.

 조금씩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지자, 아이 얼굴은 성취감과 뿌듯함으로 빛이 났고 함께하는 시간이 답답하지 않고 즐거워졌다.



 혼자서 젓가락질을 하고, 옷을 입고 벗고 지퍼를 끼우고, 운동화를 신는 등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한 많은 과정을 아이는 느리지만 조금씩 배워나갔다.

 무심코 “신발장에서 준영이 신발 꺼내서 신고 있어” 란 말에 자기 신발을 찾아 신는 아이를 보며 감격에 겨워 난리법썩을 떠는 날이 왔다. 내 말을 이해하고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고 그냥 내뱉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보여주는 이러한 성장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담겨 있는지를 알기 때문에 더욱 고맙고 대견했다.


사람들은 모른다. 민들레 홀씨를 잡고 후!하고 내뱉는 사진 한 장이 내게 얼마나 감동스러운 장면인지를...


“자 봐봐. 여기 줄기를 잡고 후 하는 거야”

“흐.....”

“아니 아니 코로 흐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입을 오므리고 후! 하고 내뱉어야 이 씨앗들이 날아가~엄마 입 봐봐”

“후!”

“오 그렇지! 성공이다! 잘했어! 준영이가 후 하고 날려줘서 내년 봄에도 여기저기 민들레꽃이 피겠네”


호흡이 짧아서 문장으로 말하지 못하는 아이의 날숨을 연습시킨다고 해마다 봄이 되면 얼마나 많은 민들레 홀씨가 흩날렸는가


오늘도 포기하지 않는 네가 수고가 많다.
좋아하는 동화책의 일부 - 아이에게 종종 읽어주면서 내가 더 많이 배운다.


매거진의 이전글 06. 그깟 종이 한 장이 뭐라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