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쉘위 Jun 15. 2024

[과거]내 맘대로 사는 건 자유가 아니었다.

진정한 자유를 찾아서.






매일매일 되풀이되는 단조로운 일상에 지쳐가고 싶지 않은 한 40대 여자이자, 엄마, 아내의 고군분투 해방일지. 전 세계를 돌고 돌며 나 다운 꽃을 피울 수 있는 땅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돌고 돌아 다시 대한민국 땅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대한민국 땅을 한 번도 떠나본 적 없고 떠날 생각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 혹은 평범하지 않은 )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육아를 하면서 같은 언어를 쓰지만 다른 언어로 이해하고 있고 같은 집에 살지만 다른 살림을 하고 있는 듯 가깝지만 먼 한 남자와 살면서 매일 해방을 꿈 꾸며 하루하루 도장 깨듯 버티며 살아가고 있다. 버티다 보니 결혼 한지도 벌써 3년, 천일이 지났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버티는 동안 시들지 않기 위해 특별한 성취와 자유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버티는 힘이 될 것이라 믿는다.





#2012.

내 인생에 첫번째 위기. 그리고 우울증.


눈을 뜨는 게 무척이나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것도, 이불 밖을 나오는 것도 내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이불 밖을 나올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이렇게 자다가 죽어도 아쉬울 게 없었다.

눈을 뜨고 이불 밖을 나올 이유를 찾지 못했다. 기대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무력감과 우울감이 오랫동안 몇 달간 지속되던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3개월 간 생리를 하지 않았다. 두려움에 엄마랑 같이 병원에 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본 산부인과는 낯설고 무서웠다.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아야 된다고 했다. 절차가 길어지자 점점 두려움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귀찮고 피곤하게 느껴졌다. 내 차례가 되었고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 차가운 진찰대 의자 위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의사를 기다렸다. 여 의사가 있는 병원이었지만 모르는 사람 앞에서 다리를 활짝 벌리고 앉아 있는 기분은 이상하고 불편했다. 몇 분 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두려움과 한편으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의사를 기다렸다. 나와 의사 사이에는 천 하나가 가리어져 있었고 천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차가웠고 건조했다. 내 질 사이로 알 수 없는 물체가 내 몸 안을 들여보고 있지만 나는 볼 수 없는 그 짧은 시간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낯선 이물감이 주는 불편함과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 감정이 몇 개월간 무딘 감각과 감정으로 지낸 나를 깨워주는 듯했다.


'도대체 내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짧은 정적을 깨고 의사 선생님의 첫마디는 강렬했다.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만큼...


"자궁에 피가 보이지 않아요."

"네?"

"자궁에 피가 없네요. "



모호한 말을 남기고 몇 가지 검사를 더 해보자고 했다.

여러 가지 검사를 더 진행하고 지친 상태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갑상선 호르몬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했다.

산부인과보다는 내과를 가보라고 하셨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고 나니 갑상선 기능 저하증이라면서 3개월치의 약을 처방해 주셨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 내 나이 28살 밖에 안됐는데... 내가 왜 아픈 거지.. 내가 왜.. 나 열심히 살았는데 내가 왜..?'

죽어도 아쉬울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알 수 없는 병명을 들었을 때는 두렵고 억울했다.


약뭉치를 잔뜩 받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거울을 봤다. 머리는 푸석 푸석, 얼굴은 윤기가 다 사라지고 얼굴은 퉁퉁 부어있었다. 몇 개월 간 닥치는 대로 먹고 토하고를 반복 했었다.  항상 피곤하고 졸음이 쏟아졌다.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을 만나러 가면 졸음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졸려서 집에 돌아오기도 하고 버스나 지하철에서 내리는 곳을 놓치고 시간 약속을 못 치기를 반복했다. 삶이 엉망진창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을 하기도 전에 파티 기획 사업을 시작했다. 회사에 들어가서 나를 끼워 맞추기보다 내 일을 하고 싶었다. 나를 증명하고 싶다는 생각에 미친 듯이 일을 했다. 무엇보다 일이 즐거웠다. 내가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 있을 만큼 돈을 벌어도 통장에는 항상 돈이 넉넉하게 있었다. 사람들에게 쓰는 것도 인색하지 않았다.  내 주변에는 다 나에게 달콤한 말만 건네는 사람들뿐이었고 쓴소리를 하는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내가 잘 나서 잘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성공한 삶에 도취되어 살고 있었다. 두려운 것도 무서운 것도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다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젊은 나이에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싶었다. 그리고 얻었다.




하지만 내 몸이 이상이 생긴 그때,

내가 얼마나 자만하며 잘못된 자의식으로 내 몸과 마음을 함부로 하며 살았는지 깨달았다.


세상을 다 가진거 같았던 때,

나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


내 마음대로 하고 사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했다.

대충 끼니를 때우고, 며칠 밤을 꼬박 세기도 하고, 습관처럼 담배를 피우고, 물처럼 커피를 마셨다. 어떤 날은 토할 때까지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게 젊음이라고 생각했고 나에게는 그것이 자유이자 해방이기도 했다.


하지만 젊음은 영원하지 않았고, 체력도 영원하지 않았다.

몸이 뜻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은 순간, 모든 것은 멈춰버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지속되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평생 이 작은 알약 (갑상선 기능 저하증 호르몬 조절에 필요한 신지로이드)에 의지하며 살아야 된다는 말을 의사에게 듣고 3개월치 약 뭉치를 손에 쥐고 나오던 그날, 몸에 힘이 쫙 빠지는 경험을 하고서야 내 인생에 단 한번도 해본 적 없는 가장 큰 결심을 했다.


내가 나의 몸의 주권을 회복하겠다고!



28살,

조금은 이르기도

조금은 늦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고

누구도 말해준 적 없던

내 몸과 마음을 이해하기 위한

여정을 떠났다.


약뭉치는 부엌 서랍 한편에 넣어놓고

나는 이불 밖을 나와 아주 오랜만에

햇빛을 쬐며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운명적으로 내 눈에 들어온 책, 제목.


















그렇게 나의 치유, 해방 여정이 시작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현재]희망이 있으니까 버티는거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