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공포증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빈 화면에 빈 종이에 어떤 글을 써야 할지 몰라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글 쓰기가 두려운 상황을 말하는 것이라는데...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솔직히 그 정도의 공포를 느껴본 적은 없다. 왜냐면 역시나 안 써지면 안 쓴다 주의라서 그런지. 그럴 땐 노트북을 덮는다. 공책을 덮는다.
그런데 만약 그럼에도 꼭 써야 할 상황이라면? 예를 들어 입금이 되었다거나 약속되어 있는 글이 있다거나. 그런 경우엔 쓴다. 써야 하는 외부적인 압력이 생기면 어떻게든 쓴다. 엉망이든 뭐든 끄적인다. 약속은 지켜야 하고 돈은 받아야 하니까.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그래서 가끔 그걸 역이용해서 내가 나에게 글을 쓰게 만들기도 한다. 어떻게든 조건을 걸어두고 그다음엔 마치 게임처럼 그 미션을 수행하는 재미를 찾으려고, 즐겁게 쓸 이유를 만들려고 애를 쓰곤 한다.
생각해보니 무엇보다 다행한 건 내게는 열두 척의 배가 아니라 나의 글 뇌를 저절로 움직이게 만드는 수백 개의 카페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곳은 나에겐 글쓰기의 마법 공간이다. 진한 커피 향과 달달한 디저트와 적당히 거슬리지 않는 음악과 사람들의 움직임과 백색소음 속에 들어가 있으면 대부분의 글은 잘 풀린다. 또는 그곳에서 풀릴 실마리를 찾는다. 또는 이도저도 안 되더라도 마음은 덜 복잡해진다.
하지만 잘 써진다고 자주 가지는 않는 편이다. 꼭 필요한 때 써야 하기에. 닳아 없어질까 봐 그 빛을 잃을까 봐 아껴둔다. 때로는 그냥 거기에 그것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언제든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슨 빽이 있는 것처럼 든든하다. 나에겐 아직 가지 않은 카페들이 셀 수 없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