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장편영화배우 오디션 공고였는데, 그때는 나름 노하우가 생긴 터라 덤덤한 마음이었다.
약간의 여유와도 같은 주머니가 내 곁에 넉넉하게 채워진 느낌.
앞서 제작한 두 편의 장편영화와는 다르게 스스로 보유한 스킬의 경지를 확인하며 제법 흐뭇한 상태였다.
양 손바닥에서 강도를 조절할 수 있는 레이저를 실험적으로 발사시키며 내 상태를 확인했다고나 할까.
범접할 수 없는 기라성 같은 선배님들이 계시지만, 나도 이제 초보 딱지를 떼고 매뉴얼 자동차로 오르막 정도는 마구 오를 수 있다고! 외치는 정도라고 해두자.
저 높은 계단의 비상구까지 다다르진 못할 지라도 이제 들어선 초보들에 비해서는 꽤나 높은 지점에 와 있는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것이었다.
이런 상태라는 것을 아는 걸까. 사람들이?
아니면 입소문이라는 것이 이토록 무서운 것일까.
공고를 올린 당일에 이메일을 받는 저장공간이 부족하여 허겁지겁 수신함 공간을 늘려야 했다.
첫 번째 장편영화는 나의 말도 안 되는 고집으로 색다른 오디션을 진행하였다.
이 것은 굉장히 은밀하고도 자랑스러운 일이므로 다음에 공개하는 것으로.
두 번째 영화 때에는 영화판에 뛰어든 이후, 격식을 갖춘 최초의 오디션이었다.
물론 매사에 장난이 심한 나의 의견으로배우가,감독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도록 교묘한 자리배치를 해두었으나 그것은 일종의 익살스러운 장치였기에, 전반적으로는 매우 보편적이고 정갈한 오디션이었다는 평을 받았다. 또한 프로필 접수 단계에서 이미 주, 조연을 잠정적으로 선택한 오디션이었기에, 많은 배우 중 소수의 배우를 선정하는 것이 아니기도 했다. 거의 정해진 배우 중 주, 조연을 가리는 정도, 한 배우와 심도 깊은 시간을 가졌던 오디션이었다.
첫 번째 영화 제작 시절, 우리는 부유한 영화사로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은 투자를 받지 않고 진행했다는 점이다.
그토록 많은 인원이, 버스까지 구비하여 이동하는 것을 인근 많은 사람들이 보며 신기해하였다.
장비도 단 하나 대여하지 않았다. 각종 조명이며 오디오 장비며 모든 촬영에 필요한 장비를 직접 구비하였으며, 촬영 스테프들이 움직일 때는 겨울 외투에 조끼까지 모두 세트로 옷을 맞춰 입고 다녔기에, 우리의 이동 만으로도 사람들은 걷다가 한 번 더 고개를 돌려보곤 했다.
누군가는 선망의 시선으로.
누군가는 호기심으로.
누군가는 그랬겠지.
어라? 저 또라이들 뭐냐?
우리를 보며 누군가는 허세라고 했다.
굳이 그렇게 한꺼번에 옷을 맞춰 입어야 할 필요까지 있었냐며, 그 돈 아껴 제작비에 더 보태면 좋지 않냐고 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었겠으나 그럼 우리 스테프들에게 한 번 물어볼까? 처음으로 영화 스테프로 발을 들여놓은 막내까지 같은 옷을 입고 우리의 로고가 박힌 조끼를 덧입고 현장에 우루루 등장했을 때, 허세 같아서 부끄러웠는지, 아직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은 없으나 이런 영화쟁이들과 함께라는 소속감이 있어 설레고 뿌듯했었는지?구석에 가서 은밀히 한 번 물어보면 어떨까.
이 마음 자체가 허세인 건가? 내 중심이 타인의 시선에 가 있는 것이 아닌, 내 가족 세워주기에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니, 어떤 평에도 나는 자유롭다.
두 번째 영화는 내게 크고 아픈 가르침을 남겨주었다.
감독으로서 울타리 안의 선한 양을 지켜내기 위해, 낙오자들을 과감히 잘라내야 하는 강단에 대한 실전에 무기 하나 없이 나를 투입시켰는데, 그 과정을 해쳐 나오며 처음으로 차 안에서 오열했던 기억도 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지만.
어쨌든 두 번째 영화 제작과정에서 나의 매정한 결단 후 소중한 인연들이 남았다.
돌아보니 제작했던 영화 중 가장 초호화스런 시간이 그때가 아닌가 싶다.
캐스팅된 배우 개개인마다 각 숙소가 다 있었으니.
자세한 이야기를 풀고 싶으나 오늘 하고픈 이야기는 그런 것이 아니기에, 다시 또 패스.
세 번째 영화 공고를 내고 몰려든 프로필과 그때 진행된 오디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3일째 되는 날 접수를 더 이상 받을 수 없겠다고 판단했다.
3천 개의 프로필이다.
두 번째 오디션 때 접수기간 내에 수신된 프로필이 300개였다.
1년 만에 열 배가 불어난 양의 메일이 훨씬 짧은 기간 내에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심지어 그 프로필에는 우리에 대한 인지도가 담겨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애초에 5년 정도의 계획이었다.
첫 번째 영화를 찍고도 개봉하지 않았고(이때까지만 해도 나의 의지였고 전략이었다. 지금은 반 정도는 개봉을 못하고 있는 결과가 되고 말았지만), 두 번째 영화를 찍고도 개봉하지 않았다. 세 개를 찍고 한꺼번에 개봉하는 것이 내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두 번째 영화까지 우리가 알려질 리 만무했다.
그런데 접수된 프로필 속 배우들이 우리를 알고 있었다.
전문가가 아니어서.
뮤지컬 극작, 작사를 하던 사람이어서.
꿈이 영화를 제작해보는 것이었을 뿐이어서.
유학을 갈까 몇 번이나 망설이다 백번 공부보다 한 번 부딪히는 게 낫겠다 싶어서.
맨 땅에 헤딩하며 얼마나 많이 다치고 깨지고 찢어졌으면 원형탈모는 당시 내내 달고 살았었는데.
그랬기에 더욱
진실함만이 정답이다 생각하고, 모르면 모른다, 이 부분에 있어서 배우 당신이 더 잘 안다면 도와달라, 내가 감독이네 하지 않고 매 순간 힘겨워도 진정으로 대했던 그 마음이 전달되어 우리의 진정성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프로필 속 배우들이 알고, 배우들의 소속사가 우리를 알고 있었다.
오디션이 진행되었다.
몸 담고 있던 뮤지컬 극단의 극장에서 오디션을 진행했다.
3천 개의 프로필에서 100명의 시나리오 속 인물을 찾아내는 것이 그토록 힘겨운 작업인지 처음 알았기에 내 수고가 크게 느껴져, 다음에 또 이렇게 많은 프로필이 몰려오면 이런 정성을 들여서 보게 될까? 하는 이때야 말로 약간의 허세가 마음에 자리한다.
이번엔 자리 배치도 정확히 해두었다.
감독인 나, 카메라로 배우를 찬찬히 살필 촬영감독님, 제작부장님과 라인 프로듀서까지, OST와 BGM을 담당할 음악감독님까지, 지난 영화에서의 주인공을 맡았던 배우 한 명까지.
스테프들은 오디션을 볼 각기 조마다 다른 내용의 미션들을 배분하였고, 오디션 자체는, 배우들이 한 번도 접해본 적 없었을 우리만의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배우들은 즐거워했다.
아니 새로워했다.
여기까지였다.
내가 세팅해둔 기획의 동선 내에 움직이는 배우를 보며, 내 시나리오에 걸맞은 역할을 찾는, 책임자의 자리에 내가 앉아있던 것 말이다.
미션 2는 배우가 준비한 연기, 배우가 강점을 보여줄 수 있는 연기를 자유롭게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아,
이래도 되는 것인가.
긴장감 책임감, 누구 못지않게 짊어지고 있다고 자부하던 내 앞에 놀라운 상황이 펼쳐진다.
무장된 내 갑옷 따위가 무색하다.
몸이 앞으로 쏠리며 절로 주먹을 쥔 내 눈 앞에는,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전투 중인 장군들이 실전에 투입된 듯 전쟁을 펼친다.
내가 감히 이들을 평가한다고?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이 길어도 5분 이하이다.
주연이 될 수도 있으나 조연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 2회 차뿐인 단역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것에 저들이 쏟아내는 에너지를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이 미안할 만큼 그들은 필사적이었다.
단 한 번도 하나의 역할을 위해 저들 만큼 용기를 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그 순간 깨달았다.
가슴에 저절로 손이 올려졌다.
경쟁이 싫어 투자도 받지 않고 곧장 책임자의 자리로 직진한 내가, 짧은 부분의 영화 속 한 장면을 위하여 모든 것을 쏟아내는 저들을 평가한단 말인가.
100명 중 20%만 우리와 함께 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종이로 된 프로필을 탈락시킬 때와는 너무도 다른 감정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정오 이후에 시작하여 저녁이 되어서야 끝난 오디션장을 나오며, 경의로운 마음을 고이 껴안았다. 실전에서 만나게 되는 날 내가 더욱더 잘하겠노라 수없이 다짐했다.
대부분 탈락자에겐 연락을 하지 않는 곳도 많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말도 안 되는 무례함을 실행할 생각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기에, 80명의 뜨거웠던 에너지 장본인, 함께 하지 못할 이들에게, 건조한 거절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한가득 근심으로 창 밖만 바라봤다.
우리 모두의 무거운 마음으로 채워진 차는 고요했다.
창 밖으로 가로등은 휙휙 지나고, 차들이 무수히 오가는 길에서, 쉬이 떠오르지 않는 결론에, 안타까움, 미안함 뒤엉킨 마음이 스치는 네온사인에 긁히고 긁히고 긁히고.
몇 년이 지났다.
아직도 그날은 내 가슴속에 하나의 아이템으로 존재한다.
그날, 용기라는 아이템을 장착하여 무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그들의 충전이,
내 안에 아직도 유효하다.
요즘은 배터리를 가진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지.
내 안에 그날 그들이 심어준 절대 죽지 않을 배터리가 존재하는데, 난 더 이상 누구를 부러워할 수 있을까.
그날 그 무대 위 그들의 열정과 도전에의 용기는, 살아서 펄떡펄떡 날뛰는 대어보다 요란하게 내 심장을 아직도 두드리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