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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Aug 08. 2019

힐러리 자스민과 도널드 자파

영화 <알라딘> 리뷰

<알라딘>, 메가박스 백석점. 디즈니의 '속죄' 시리즈. 원작 대비 상당한 각색이 이뤄졌고, 나는 원작보다 좋았다. 아랍 왕국에, 중세라는 명백한 배경에, 천민 남성과 왕족 여성이 등장하는 이야기라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한계 속에서 최대한의, 때로는 초월적인 각색을 해냈다. 디즈니 원작 실사영화 시리즈 중 최근작인 <미녀와 야수>가 어설프게 시도한 페미니즘적 각색이 말 그대로 '양념'에 불과했다면, <알라딘>은 그보다 훨씬 더 진취적이고 정합적으로 각색했다. 원작의 장점을 극대화하면서, 도전적인 각색으로 단점들을 지운 수작.


다만 디즈니 컴퍼니의 온갖 영화(디즈니 애니메이션, 실사영화, 마블, 스타워즈...)를 다 챙겨보고 있는 관객으로서는 디즈니의 속죄 주제인 "여성의 선택" 주제가 슬슬 지겨워지는 측면은 있다. 여성을 주체로 내세우는 것은 당연히 좋지만 "주체적 선택" 말고 좀 더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 텐데. 물론 디즈니는 한 50년 정도는 더 속죄해도 마땅할 테지만. 하여간 그래서 <알라딘>도 그 속죄의 맥락에 있다. 수동적인 공주상으로 그려졌던 자스민을 대단히 진취적인 왕족 후계자로 바꿔냈다. 특별히 자스민을 위한 노래를 새로 만들어주기까지. <Let It Go>와 굉장히 유사한 분위기 및 가사인데, 생각해보면 영화의 이야기 전개 자체도 <겨울왕국>과 꽤 유사하지 싶다.


아무튼 나는 정치병에 걸린 사람이라 <알라딘>도 정치적으로 읽혔다. 그도 그럴 것이, 자스민을 술탄으로 만들어버렸는데 이게 정치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정치적 텍스트를 구성하는 알레고리라는 것이 흥미롭다. 당연히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다소 불완전한 알레고리일 수밖에 없지만, 대강 다음과 같은 얘기다.


자스민은 공부를 아주 많이 한 공주다. (다만 자파에게서 "경험은 공부로 배울 수 없다"고 지적당하고, 이 지적이 별로 부정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아버지인 술탄은 늙어가고 국법상 후계자는 남성, 무엇보다 '왕자'여야 하는데 타국 왕자들을 여럿 불러봐도 괜찮은 왕자, 아니 남자가 보이질 않는다. 자스민은 자기도 술탄이 될 자격이 충분한데 왜 그냥 내게 물려주지 않느냐고 따지지만, 아버지는 "그건 너무 위험해" 하며 자스민을 주저앉힌다.


후계자 지명이 지연되는 동안 나라의 총리격이자 이 영화의 메인빌런인 자파는 술탄의 자리를 노린다. 그가 술탄의 자리를 노리는 이유는 권력, 대외명분으로 내세우는 건 '지금 술탄이 너무 무르다'는 것이다. 안보 위기인 지금 '시라바드'를 선도적으로 침공해서 국경을 강화해야 하는데 술탄은 그런 선택을 미룬다는 것이다. (술탄은 우방국을 공격할 수 없다고 말하며, 자스민은 그 나라가 '엄마의 나라'이기 때문에 공격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파가 침공 조언을 할 때마다 술탄은 "네 주제를 알거라"라고 쏘아붙이며 그를 주저앉힌다. "네 주제"란 무엇일까. 자파의 출신이다. 그는 원래 거리의 좀도둑이었다. 그런데 어찌저찌 자수성가해서 그 자리까지 올라온 것이다. (사족으로, 원작 대비 가장 매력이 떨어진 게 자파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주인공인 알라딘. 그도 거리의 좀도둑이다. 우연히 자스민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데, 공주인 자스민과 만나기엔 그의 신분이 보잘 것 없다. 그래서 그가 지니에게 처음 빌게 되는 소원이 자기를 왕자로 만들어달라는 거다. 그 소원이 이루어져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의 왕자 '알리'가 된다. 그는 이제 자스민에게 구혼하러 왕궐에 들어갈 수 있게 됐는데, 결국 자스민에게 정체를 들킨다. 하지만 그가 둘러대는 말은 "나는 원래 왕잔데 좀도둑으로 살아온 것." 알라딘이 이 영화에서 가장 번뇌하는 주제다. '나의 원래 정체성을 버리면 안 되는 걸까?' 물론 그의 최종 선택은 원래의 정체성, 즉 천민의 삶이다. 자파와 대비된 선택이라는 점에 주목해두자.


이 같은 이야기들은 어쩐지 2016년 미국 대선을 떠올리게 한다. 힐러리 클린턴의 최초의 여성 후보가 됐지만 기존 리버럴의 지지자들은 그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지지를 망설인다. 그 와중에 상대는 도널드 트럼프다. 그의 원래 정체성이 뭔가. 다소 쌍스러운 부동산업자이자 방송인이다. 결과적으로 당시 대선의 향방을 결정한 건 러스트벨트의 노동자들이었다. 주류 리버럴들은 그들의 지지기반을 망각한 것처럼 보였다. 노동자가 그들의 지지기반이었으나 정작 그들이 짝짜쿵한 건 자본가, 엘리트들이었다. 물론 다소 무리한 단순화지만, 대강 <알라딘>의 갈등구조와 닮아있다고 봤다.


하여간 이런 갈등구조 속에서 자파는 술탄이 되고, 기존 술탄과 더불어 자스민, 그리고 자파에게 램프를 뺏긴 알라딘까지 위기에 처한다. 여기서 '하킴'이라는 군 지휘관이 주요 역할을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공주를 알고 지냈으며 누구보다도 충직한 군인이나, '국법상' 술탄이 된 자파의 명령에 복종하기를 택한다. 그런 그에게 자스민은 "당신이 옳다고 믿는 걸 하라"고 설득하고, 이 설득에 마음을 바꾼 하킴은 자파를 공격한다. (물론 자파의 마법에 패배하지만.) 아무튼 구체적으로 적자니 글이 너무 길어져 생략하게 되는 이차저차한 이야기 끝에 알라딘은 자파를 '좁고 어두운' 램프에 가두며 술탄은 자스민을 후계 술탄으로 승인(!)하고 술탄이 된 자스민은 '천민임을 받아들인' 알라딘과 결혼하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앞서의 갈등구조가 '현상 파악'이라면 뒤의 전개는 '대안 제시'에 가깝다. 그래서 지금 디즈니가 다시 리버럴의 집권을 성취하기 위해 뭘 대안으로 제시하는가? 리버럴 정치인들은 다양성의 가치를 적극 받아들이고, 집나간 지지자들은 '네 원래 정체성'을 깨닫고 빨리 돌아오라는 것이다. 다양성을 상징하는 자스민과 기존의 리버럴을 상징하는 알라딘이 혼인하는 결론이 그렇다. 최근 디즈니의 정치적 알레고리들과 거의 유사한 편이고, 약간 진전된 부분이라면 '지지자 그룹'에 대한 표현 정도랄까.


딱 디즈니다운 이런 이야기에 대해 굳이 본질적인 비판을 가하는 것도 이제 좀 지루한 일이니 관두기로 하지만, 몇 가지 지점들에는 의문부호를 붙이고 싶다. 술탄이 자파에게 하는 말("네 주제를 알라")은 결국 정치를 다시 엘리트의 것으로 귀속시켜야 한다는 뉘앙스가 아닌지. 알라딘이 자기 원래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것의 뉘앙스도 비슷하다. 결국 이것이 누구의 시선에서 그려진 이야기냐를 묻고 따지지 않을 수 없는 것. 그리고 그렇게 술탄이 된 자스민은 아버지와 다르게 어떤 정치를 펼칠 것인가? 결말에서 이 부분을 피상적으로나마 펼치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약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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