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알라딘> 'Speechless' 시퀀스에 관해
Speechless.
1.
<알라딘>에서 가장 강력한 노래라는 평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까. 원작에는 없는, 실사화되면서 새롭게 작곡된 곡이고, 각색된 알라딘의 가장 핵심적으로 변화된 주제의식을 보여주는 곡이다. 하지만, 혹은 그래서 영화 전체 분위기를 생각하면 가장 부조화스러운 노래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판타지-동화 같은 분위기의 노래들이 배치된 알라딘에서 갑자기 <겨울왕국> 풍의 어둡고 차가운 락발라드(?)가 나오니 어쩔 수 없이 부조화스러울 수밖에.
특히 두 번째로 이 노래가 나오는 장면의 연출도 영화의 전체 분위기를 크게 거스른다. 갑자기 시간이 멈추고 자스민의 상상을 보여주는 듯한데, 뭐랄까, 인도 풍의 뮤직비디오를 보는 것 같았다.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지 못하고 혼자 붕 뜬 것처럼 연출된 까닭에 역설적으로 이 노래는 관객의 뇌리에 가장 깊이 기억되는 노래가 됐다. 정작 원작의 메인곡인 <A Whole new world>은 원작의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버리고 그저 몽환적이고 단순한 풍경으로 각색되면서 상대적으로 무게가 떨어졌다고 느꼈다.
2.
내 감각에선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을 피할 수가 없지만, 그렇게 연출될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참신하게 각색해도 기본적으로 원작의 틀을 아주 벗어나긴 어려우니까. 잡혀가던 자스민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고 각오하고 돌아나서지만, 사실 이 장면에서 자스민이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상대는 마법사이고, 술탄이다. 군대도 그에게 충성을 보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자스민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도 여기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래서 나는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 서사를 그리려면 이런 상황이 아닌 다른 상황을 그렸어야 한닥 생각하게 됐다.) 그러니 침묵하지 않는 자스민의 행동은 상상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다.
결국 책을 많이 읽은 것 외엔 가진 능력도 경험도 없는 자스민이 실제로 한 것은 뭐였나. 하킴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하킴이 누군가. 그는 전형적인 법치주의자다. 자파를 가둘 때 "Law is the law"라고 윽박지르고, 다시 그 자파가 술탄이 되어 "Law is the law"라고 충성을 요구하자 그 말에 순응하는 원칙주의자. 그런 그에게 자스민이 설득하는 논리는 이렇다. "법에 따를 것이 아니라, 네가 옳다고 믿는 것을 하라." 하킴은 이 말에 마음을 바꿔 자파에게 반격을 가하는데, 아무튼 결과적으로 실패.
뭔가 자스민이 당당하게 상황을 바꾸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기엔 그 방법과 결말이 너무 초라하지 않나? 결국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선한 남성을 설득하는 것인가? 그마저도 실패로 끝나게 되는 것을. 디즈니는 그들의 계급적 위치상 온건함 너머의 무엇을 차마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 정도의 온건함조차도 '페미 묻었다'며 수용하지 못하는 자들이 5톤 트럭에 태워 경부고속도로를 가득 채울 수 있을 만큼 즐비하니 그 너머를 볼 필요도 없는 것일 테지.
3.
나는 트럼프 이후의 헐리웃 영화는 대부분 미국의 정치적 상황을 둘러싼 알레고리라고 생각하는 편이고, 특히 디즈니 영화는 더더욱 그렇다. 이런 전제 하에 하킴의 장면을 얘기하자면, 하킴은 유권자다. 어떤 유권자? 오랫동안 민주당의 지지층이었으나 지난 선거에서 트럼프로 돌아선 유권자. 즉 러스트벨트의 노동자 계층이다. 아니면 지난 선거에서 트럼프를 뽑지 않았으나 이제는 '법은 법이다'라면서 다음 선거만 바라보고 있는 자들일지도. 디즈니는 이런 자들에게 "법이 아니라 옳은 것을 따르라"고 요구하는 것이고, 이는 다시 말해 지금 당장 트럼프에 저항해야 한다는 요구일 게다.
기본적으로 나는 이런 주장에 공감하는 민주주의자다. 트럼프가 나라를 망치고 있는 게 명백하다면 '지금 당장' 끌어내리기 위해 뭔가를 시도하는 게 더 나은 민주주의다. 시민에겐 그럴 권리가 있다. 다만 그런 저항을 요구하는 주체가 누구냐는 것이다. 자스민? 자파에게 직접적으로 권력을 빼앗긴 왕족이자, 저항의 결과로 술탄의 지위에 오르게 되는 공주다. 그런 그의 '저항하라'는 메시지는 결국 '내 권력을 되찾게 도와달라'는 뜻일 수밖에 없지 않나? 우리 시민들이 이런 의도의 주장을 기꺼이 민주주의로 승인해줘야 하는 걸까? 아이고 제가 정치병 말기라서...
4.
아무튼 Speechless는 영화의 맥락에서 벗어나 보면 너무 괜찮은 노래이고 full 버전이랑 part 2 버전 둘 다 구매해서 열심히 듣고 있습니다 헤헤. 분위기로 보나 가사로 보나 여러모로 let it go도 떠오르고, 예전 비욘세의 listen도 생각난다. 대체로 이런 노래는 절규하는 듯한 보컬이 노래 가사와 맞물려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유튜브에서 찾아보니 너무 '수월하게' 부르는 커버곡들이 많아서 좀 아쉽다. 째지는 보컬로 부른 커버곡을 찾고 있는 중이다. (네 시간 전에 김나영의 커버가 올라왔다!!!)
한편으론 커버곡이 많다는 자체가 또 재밌다. 여성이라고 억압당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외치겠다는 가사의 노래를 수많은 여성 가수들이 부르고 있다는 것. (그 중엔 K-Pop 스타 출신의 박지민도 있다.) 가사를 얼마나 생각하면서 부르는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유의미한 풍경이고 일종의 문화적 현상이라 생각한다. 디즈니가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지가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이런 영향력 때문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