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웨스트윙> 시즌7 21화 리뷰
웨스트윙 두 번째 정주행을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품었던 생각은 이번엔 누가 가장 기억에 남을 것인지였다. 주인공들이야 원래 기억에 남는 것이고, 주변 인물들 중에서 기억될 만한 인물이 남는다는 것은 그 이야기의 디테일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증명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웨스트윙은 디테일이 뛰어난 이야기다. 말 많고 자기 주장 강하고 일 중독자인 엇비슷한 캐릭터들이 왕창 등장하는 가운데서도 각각의 성격이 서로 확연히 구분된다. 샘이 윌에게 "너도 우리랑 똑같아"라고 했다지만 정말 샘과 윌은 똑같나? 물론 일 중독자인 건 똑같지만, 샘이 다소 순진무구한 엘리트주의자라면 윌은 능글맞은 엘리트주의자다. 윌과 조쉬는 또 어떻게 다른가? 조쉬는 능글맞다기보다 독선 그 자체의 엘리트주의자다. 리오는? 필요에 따라 그 모든 것들을 연기할 줄 아는 자다. 그래서 그는 엘리트주의자임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여간 이런 와중에서 그 일 중독자들에게 '삶'을 알려주는 주변 인물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나는 아무래도 이들에게 시선이 가고 결국 이들을 가장 사랑하게 된다. 첫 번째 정주행에서는 비서실장의 개인비서인 마가렛이었다. 여러 인물들이 자리를 조금씩 바꾸는 동안 단 한 번도 자리를 바꾸지 않고 그 자리에 끝까지 남아 리오와 CJ에게 동등한 충성과 기여와 애정을 보인 캐릭터. 그는 일하느라 집에 들어가지 않는 리오를 억지로 집에 돌려보내고, 일을 핑계로 사적 관계를 회피하는 CJ의 스케쥴을 의도적으로 비워 사적 관계에 직면시킨다.
두 번째 정주행에는 대니 콘캐넌이 보였다. 퓰리처 상을 두 번이나 받은, 워싱턴포스트의 백악관 출입 선임기자로 등장한 그는 탁월한 직관과 끈질긴 취재로 시즌 내내 바틀렛 행정부를 위기로 몰아간다. 그런데 단지 기자로만 등장하지 않고 당시 백악관 대변인이던 CJ 크렉에게 꾸준히 플러팅을 보내기도 한다. CJ 크렉은 그에게 호감이 있으면서도 직무상 기자와 사적 관계를 맺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여겨 임기 내내 그에 대한 것을 미뤄두다가, 임기 말 즈음에 와서야 그와 동거를 시작한다. 물론 CJ가 비서실장으로 보직을 바꾼 것도 있지만, 그동안 대니도 기자직을 관뒀던 것도 중요한 변화 요인이다.
동거를 시작했다지만 CJ는 여전히 대니와의 관계를 무엇이라고 정의내릴지 결정하지 못했다. 아니, 결정하지 않는다. CJ 또한 조쉬, 샘, 윌 못지않은 일 중독자라서다. 레임덕이긴 해도 그는 여전히 할 일이 많다고 느낀다. 또한 여성으로서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 올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는 페미니스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퇴임 이후의 커리어를 고민하고 싶지, '그깟' 사적 관계에 대해 고민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시즌7 21화는 바로 이 갈등을 다룬다. 대망의 피날레를 한 화밖에 앞두지 않은 에피소드임에도, '정치 드라마' 웨스트윙은 '정치'가 아니라 '삶'을 이야기하기를 택한 것이다.
21화에서 대니는 CJ에게 약간 매달리다시피 군다. 우리 관계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일 말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눕시다! CJ는 이런 대니가 부담스럽다. 앞으로의 커리어를 결정해야 한다. 그에게 들어온 제안은 무수히 많은데, 관심 가는 건 둘이다. 차기 산토스 정부에서 선임고문으로 일하는 것과, 제3세계를 지원하는 100억 달러짜리 재단(부럽다)에서 책임자로 일하는 것. 고민의 와중에 대니가 무턱대고 찾아와 "중요한 얘기"가 있으니 점심을 먹자고 하는데, 실은 그런 건 없고 그냥 "같이 걷고 싶었"단다. "낮에 만나 당신 일 얘기 듣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요."
CJ는 그런 대니가 부담스럽다고 느끼면서 "백악관에서 일하기로 마음 먹었다"고 말한다. 대니의 대답. "좋아요, 그런데... 나와 의논할 생각은 해봤어요?" 다시 CJ의 다소 신경질적인 대답. "내가 왜 내 커리어를 당신과 의논해야 하죠?" 그런 관계도 아니라고 생각할 뿐더러, 대니의 말이 CJ로서는 '여성은 독립적으로 결정할 능력이 없다'는 성차별적 편견의 표현이라고 느꼈을 수도 있다. 이렇게 둘의 관계는 좀 흔들리는데, 이후에 여차저차한 과정을 거쳐 일상의 소중함을 깨달은 CJ는 다시 대니를 찾아가 "내가 어떤 커리어를 선택했으면 좋겠어요?" 하고 묻는다. 그러자 대니는 가볍게 웃으며 말한다. "당신이 원하는 걸 해요." 대니는 애초에 CJ의 결정에 개입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단지 그가 고민하는 것을 자기에게도 나눠달라는 것, 일상의 동반자로서 자신을 받아들여 달라는 것일 뿐이었다.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CJ가 그럴 만한 여유를 갖기를 더 바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그제서야 CJ는 자기가 오늘 겪은 사소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하고, 그렇게 21화가 마무리된다.
이런 이야기 구도, 즉 '일에 미친 사람'과 '그와 일상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의 갈등 구도는 대체로 '일에 미친 남자'와 '그와 일상을 함께하고 싶은 여자'의 구조로서만 얘기된다. 특히 정치를 다룬 드라마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등장하는 갈등인데, 예를 들어 아내의 생일에 저녁 식사를 예약한 남편-정치인이 급작스럽게 발생한 정치 사건과 약속 사이에서 무엇을 택할 것인지와 같은 이야기 말이다. 물론 <웨스트윙>에도 이런 갈등이 등장해 왔는데, 이번에야 그 고정된 성 역할을 뒤집었다. 게다가 이 에피소드에서 대니가 수행한 것은 단지 'CJ와 일상을 함께하고 싶은 남자'가 아니라, 'CJ에게 일상의 소중함을 가르쳐주는 남자'였기 때문에 더 특별하고 소중한 이야기가 됐다. 내가 앞의 이야기들에 나오는 남자들보다도 이번 이야기에서 대니에게 더 마음이 움직인 이유가 무엇일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아마도 오랫동안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왔기 때문일까.
'정치의 시간은 끝났다, 이제 너희들의 삶을 살아갈 시간이다.' 나로서는 이 에피소드가 웨스트윙 제작진이 한동안 고생시킨 캐릭터들에게 화해의 선물을 전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야기의 가장 막바지에서 '정치'가 아니라 '삶'을 이야기하기로 결정한 까닭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