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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Aug 08. 2019

USA 스토리, 아메리칸 파일

드라마 <아메리칸 크라임 스토리 : O.J 심슨 파일> 리뷰

<아메리칸 크라임 스토리 : O.J 심슨 파일>, 넷플릭스. 힘차게 다 봤다. 초반에는 다소 설렁설렁 풀어내길래 약간 지루해져 진도가 안 나갔는데, 중후반은 엄청나게 빡빡하게 풀어내서 숨이 벅차 진도가 안 나갔다. 이래저래 진도가 느렸지만 상당한 수준의 10부작 드라마. 특히 배우들의 연기는... 이들이 곧 실존인물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열정적이다.


O.J 심슨 사건에 대해 부분적으로만 알았지 발단과 전개, 결말을 디테일하게 들여다본 건 이번이 처음인데, 정말 미국의 모든 병폐를 다 담고 있다. 드라마 역시 단지 사건 파일을 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병폐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데 관점을 할애한다. "The People v.s. O.J Simpson"이라는 부제가 정말 찰떡같이 잘 어울린다.



병폐들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이 글은 분량이 과다해질 텐데, 그래도 안 할 수는 없으니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살인사건에 유명인이 연루됐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에 대한 도의와 최소한의 취재윤리를 모두 저버리고 달려들어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어버린 미디어, 직업인으로서의 사명이 아니라 자기가 유명해질 수 있는 기회로 이 사건에 달려드는 법조인들, 역시 자기가 유명해지기 위해 거짓으로 가득찬 회고록을 내는 주변 지인들, 또 그들을 거액의 출판료로 회유한 출판계, 명백한 증거보다 자극적인 쇼에 의해 좌우되는 배심원 제도, 그리고 무엇보다 인종차별, 성차별. 이 모든 요소들이 얽히고 얽혀 만들어낸 게 바로 O.J 심슨 사건임을 이 드라마는 치밀하고도 꼼꼼하게 보여준다.


특히 인종차별에 대해 얘기하자면 또 이야기가 길어질 테지만 꽤 흥미로운 부분이라 간단하게 쓰면, O.J 심슨 자신은 자기가 흑인이 아니라고 떠드는 사람이었다. 백인 부자들이 거의 대부분을 이루는 마을에 들어가 살고, 백인 여성과 결혼하고, 백인들과 파티를 즐기는, 말하자면 '명예백인'이랄까.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흑인이다. 그런 그가 백인 여성인 전 아내를 살해했다는 의혹을 백인 경찰과 백인 검사가 제기하니, 그의 변호인들은 재판의 초점을 인종차별로 끌고 가려 한다. 동시에 이 사건은 남편이 전 아내를 죽인 가정폭력 사건의 성격도 가진다. 그래서 배심원을 선발하는 과정이 엄청나게 흥미롭다.


먼저 백인 여성은 변호인들 입장에서 최우선으로 배제해야 할 정체성이다. 살해당한 것이 백인 여성이므로, 그들은 피고를 적대할 수밖에 없다. 그 다음 흑인 남성은 검사 입장에서 최우선으로 배제해야 할 정체성이다. 심슨이 스스로 동의하지 않는 것과 무관하게, 그는 흑인 커뮤니티의 영웅 중의 영웅이었다. 대단히 성공한 흑인이며, 특히 남성성이 짙은 미식축구로 성공한 사람이다. 이런 그에게 흑인 남성은 절대적 지지를 보낼 것이 분명하다. 남는 건 흑인 여성과 백인 남성이다. 흑인 여성은 흑인으로서는 심슨을 지지하겠으나 여성으로서는 ㅡ그들 자신도 대체로 가정폭력의 피해자이므로ㅡ 반대할 것이며, 백인 남성은 백인으로서는 대체로 인종적 편견을 갖고 있을 것이나 남성으로서는 가정폭력의 무게를 이해하지 못한다. 앗, 이렇게 써놓고 보니 역시 백인 남성은 구제가 안 되는 집단. 앗, 내 안의 편견이... 하여간 이런 정체성을 근거로 배심원들을 골라내고 또 골라진 배심원을 교체하는 과정이 꽤 디테일하게 그려지는데, 이게 꽤 재밌다.


에구 길어진다. 주말엔 긴 글을 쓰면 안 된다. 그 시간에 영화 한 편을 더 보는 것이 이득이기 때문이다. 긴 글은 출근해서 할 일이 없을 때 몰래몰래 써야 하는 법이다. 아무튼 이 드라마는 미국이라는 사회에 대해, 또 법적 처벌이라는 제도화된 과정에 대해 꽤 심도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증거가 명백한 사건에서도 어떻게 '합리적이고 합법적으로' 무죄를 창출해낼 수 있는가에 대해서. 피날레는 역시 '회고록'이다. 이 사건과 직접 관련된 사람들 중에 훗날 회고록을 내지 않은 사람이 단 한 사람밖에 없을 정도로, 이 사건은 미국의 영원한 가십거리로서 지금도 소비되고 있다.


이 드라마를 만든 사람들이 그래서 어떤 입장을 지지하는지는 확실하게 그려지진 않는다. 그래서 O.J 심슨의 무죄 판결은 잘못이었나? '악마의 변호사'들이 만들어낸 옳지 못한 결과였나? 일부의 가설대로 그의 아들이 진범이었나? 아니면 제3의 인물이 진범이었나? 그런 질문들에 대해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이 사건에서 철저하게 잊힌 당사자들, 즉 죽은 두 사람, 니콜 브라운과 론 골드먼의 사진을 비추며 끝을 맺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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