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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Aug 09. 2019

빵과 장미를, 빵과 장미를

영화 <런던 프라이드> 리뷰

<런던 프라이드>, 왓챠플레이.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연대(solidarity)'라는 개념 하나에 집중하는 이런 영화. 사실 그렇다. '연대'라는 말을 제대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운동권들 사이에서도 "연대합시다" 하면 "나는 고대할래" 같은 헛된 농담들이 종종 오간다. 제대로 설명되기 어려운 말들의 빈틈에는 늘 허무한 농담이 깃드는 법이니까. 뭐라고 정확히 설명되기 어렵기에 '연대'라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문학적 레토릭이 동반되곤 한다. 신영복 선생님의 유명한 말, "연대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는 식으로.


말로 정확히 정의되기 어려운 이 개념은, 하지만 연대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늘 놀랍다. 연대와 시혜의 차이를 당연하다는 듯이 구분해내고, 연대자로서 또 연대를 받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의무와 역할을 정확하게 수행해낸다. 그게 연대라는 개념의 흥미로운 점이다. 누구도 정확히 규정하지 못하지만, 누구나 정확히 이해하는 것. <런던 프라이드>는 대도시 런던의 퀴어들과 변방 웨일스의 소도시 광부라는, 지역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손을 맞잡을 수 없을 것 같은'(<런던 프라이드>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연대의 정의가 바로 이것이다) 두 그룹이 어떻게 연대라는 '우산'을 같이 쓰게 되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다.


1984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기조로 석탄노조를 탄압하려 들자 노조가 장기 파업에 돌입했다가 패배한 사건이 중심 배경이다. (같은 소재를 다룬 영화/뮤지컬로 <빌리 엘리어트>가 있다.) 런던에서 퀴어운동을 하던 한 조직의 행동대장(?)이 어느날 뉴스에서 광부들이 경찰에게 탄압당하는 모습을 보곤 자기들과 닮아 있다고 느끼는 것이 영화의 시작이다. 그 단순한 이유 하나로 이들은 '광부들을 지지하는 게이&레즈비언(LGSM)'이라는 이름의 조직을 새로 꾸리고 모금운동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렇게 모금된 후원금을 받겠다는 노동조합이 없다. 왜? 이들이 퀴어라서. 남성 중심의 거친 문화와 가족-지역 중심으로 조직되는 광산 노동자들은 퀴어라는 생소하고 이질적인 존재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한다.



하지만 LGSM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여러군데에 전화를 돌렸고, '게이&레즈비언'이 뭔지 몰랐던 한 할머니(석탄은 한 지역의 산업 그 자체이기에 광부들의 부인들, 지역 주민들이 모두 파업에 참여한다)가 전화를 받곤 후원금을 받겠노라고 대답한다. 전혀 의도된 결과는 아니지만, 그렇게 빗장이 하나 풀리고 양 집단은 얼굴을 맞대는 데 성공한다. 광부들의 퀴어에 대한 막연한 혐오감은, 얼굴과 이름을 가진 실제 인간을 마주해 일상적인 교류를 나누면서 차츰 지워진다. 딱딱하고 군기잡힌 문화를 가진 석탄노조의 투쟁에 발랄하고 개방적인 퀴어들이 참여하면서 투쟁도 더욱 흥겨워진다. 남성과 여성의 경계가, 그리고 투쟁과 축제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다만 개중에는 바뀌지 않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여러 위기를 거쳐 웨일스 석탄노조는 LGSM의 연대를 거부하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연대가 끝나고, 이듬해 석탄노조는 파업을 철회하고 일터로 복귀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 걸까. 아니다. 그해에 열린 '런던 프라이드' 퀴어 행진에 영국 각지의 석탄노조들이 연대하러 달려온다. 그들은 행진의 가장 맨앞에 서서, 이제는 "The Miners Support Gay&Lesbian"이라는, LGSM의 구호에 화답하는 피켓을 들고 연대를 전했다. 연대란 바로 이런 것이다. 교환을 바라고 하는 행위가 아니지만 결국은 모든 것이 교환되는, 아니, 정확히는 '우리의 것'을 '우리'가 함께 나누는 것.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깔린다. 몇 년 뒤 영국 노동당에서 퀴어 인권을 강령으로 삼았다는 얘기다. 1984년 이전에도 같은 얘기가 있었지만 그땐 부결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가결됐다. 한 노조가 압도적인 찬성표를 던졌기 때문이란다. 어디겠나. 물론 석탄노조다.


연대라는 구심점을 가지면서, 이 영화는 정말 많은 이야기를 간결하고 충분하게 풀어낸다. 이 주제에서 당신이 기대하는 모든 키워드들이 이 영화에 다 녹아있다. 노동자운동? 물론. 퀴어운동? 당연. 페미니즘? 넘치게 있다. (다시 말하지만 석탄노조는 지역-가족 중심의 투쟁이며, 그래서 숱한 여성들이 파업에 함께했다.) 세대간 연대? 그것도 있다. 지역문제? 역시 있다. 비거니즘? 다소 농담처럼 나오긴 하지만 이것조차 있다. 음악? 춤? 빠지면 섭하다. 이 유쾌하고 따뜻하고 눈물나고 아름다운 영화에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있다. 거의 모든 장면이 다 좋았고, 거의 모든 감정들을 다 납득할 수 있었다. 올해 본 영화들 중에 손꼽히게 좋았고, 손꼽히게 울었고, 또 손꼽히게 웃었다.


좋았던 장면이 너무나 많아서 뭘 꼽기가 어려울 정돈데, 계속 생각나는 장면은 역시 지역의 정신적 지주격인 할아버지 '클리프'가 퀴어들이 떠난 뒤 동료 할머니에게 차분하고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말이다. "나는 게이예요." 동료 노인은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1968년부터 알았단다. 이 연도를 굳이 특정한 것은 아무래도 68혁명의 분위기를 상기하기 위해서일까. 아주 오랫동안 자신의 '비밀'을 숨겨온 클리프가 이제서야 커밍아웃하게 된 계기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본다. 퀴어임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투쟁하는 LGSM이 그에게 용기를 주었기 때문이겠지. 운동은, 좋은 운동은 한 사회와 제도를 바꾸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한 개인에게 용기를 줌으로써 그 사람을 바꿔놓기도 한다.


'빵과 장미'를 함께 부르는 장면도 너무너무너무x100 좋았다. LGSM의 리더인 마크가 홀에서 투쟁연대사를 하자, 화답하듯 한 여성이 노래를 부른다. "우리가 행진하고 행진하면서, 위대한 날들이 오리라 / 여성이 봉기한다는 것은 인류가 봉기한다는 것 / 더는 틀에 박힌 고된 노동과 게으름 / 한 명의 안락을 위한 열 명의 혹사는 없다 / 삶의 영광을 함께 누리자 / 빵과 장미, 빵과 장미." 1절은 여성 혼자 불렀지만 2절은 홀 안의 모든 여성들과 퀴어들이 함께 일어나 부른다. 그리고 3절에 이르러 홀 안의 모든 광부-남성들이 함께 일어나 부른다. "사람들이 우리가 노래하는 “빵과 장미, 빵과 장미”를 들었기 때문에."(1절)



대도시의 젊고 발랄한 레즈비언들이 너무 반갑고 좋았던 한 할머니는 런던 프라이드에 찾아오자마자 "레즈비언 친구들, 어딨어!" 외치며 친구들을 찾는다. 그러고는 그들을 반갑게 껴안으며 말한다. "너희들이 내 시각을 넓혀줬어." 이 말의 의미를 가만히 생각해본다. 살 만큼 살아 세상을 다 알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노인이 시각이 더 넓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나이 든 노인이 젊은 여성에게 너희가 내 시각을 넓혀주었다고 감사의 인사를 전할 수 있는 것은. 연대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이와 경험과 직업과 소득에 상관없이 서로가 서로를 가르치고 또 배우는 것이라고.


'런던 프라이드'는 번역 제목에는 약간 아쉬움이 남는다. 아마 동명의 영화가 있었기에 '런던'이라고 따로 구분한 것일 터다. 하지만 런던 프라이드라는 고유명사를 차용함으로써 '프라이드'라는 말이 갖는 함의가 많이 죽어버린 것이 무척 아쉽다. 아시다시피 런던 프라이드는 실제 런던에서 펼쳐지는 퀴어 행진의 이름이다. 그래서 런던 프라이드라는 제목은 이 행사를 특정하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프라이드라는 말은 퀴어들의 행사 이름이면서, 동시에 광부들의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 자부심이야말로 남성적 문화의 광부 노동자들이 향유하는 결정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이 의미를 담아내는 것은 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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