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 넷플릭스. 정말로 엄청나게 감동받았고 또 이유는 모르겠지만 깊은 위로가 됐다. 흑인에 대한 제도적 차별을 다룬 다큐멘터리 <미국 수정헌법 제13조>를 만든 에바 두버네이가 만든 4부작 드라마. 이 감독의 작품을 다 찾아봐야겠다. 자기만의 주제와 스타일이 확고한 가운데 매우 훌륭하게 이야기를 자아낼 줄 안다. 오프라 윈프리도 제작자로 참여했다. 여성 감독과 여성 제작자가 만든, 유색인종 남성 넷에 대한 이야기. 너무 좋았기 때문에 해야 할 일도 제쳐두고 길게 쓴다.
드라마는 1989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10대 흑인 아이 넷과 히스패닉 아이 하나가 백인 여성을 폭행하고 강간했다는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아 각각 6~14년 간 형을 살다가 진범이 자백해 마침내 결백을 인정받았다는 이야기다. 아이들은 뉴욕 할렘가에 사는 빈곤한 유색인종들이었고, 미란다 원칙은 고사하고 사회적 보편 상식조차 알지 못했다. 심지어 어떤 아이는 글도 읽을 줄 몰랐다.
그런 아이들이 범행현장 주변에 우연히 있었다. 아이들은 주변에 있었던데다 무엇보다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유력 용의자로 긴급 체포되었고, 서둘러 사건을 마무리짓고 싶었던 백인-경찰들은 '미성년자는 부모의 입회하에 취조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도 무시하고 아이들을 40시간씩이나 재우지 않고 먹이지 않고 강압 수사해 거짓 자백을 받아낸다. 경찰은 아이들에게 거짓자백 조서를 읽히고 서명을 받아냈는데, 어떤 아이들은 조서에 쓰인 글을 읽을 능력이 없었기에 그것이 거짓 왜곡인지도 모른 채 거기에 서명해야 했다. 몇몇 부모들은 서둘러 올 수 없었다. 그들은 직장에서 조퇴할 권리가 없었다. 하층 노동자였던 그들에게 조퇴란 곧 해고를 뜻했으니까. 아이가 경찰서에 있는 걸 알면서도 일을 하러 가야만 했다.
10대 유색인종 아이들이 '감히' 백인 여성을 강간했다고 알려진 이 사건은 미국에서 아주 유명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범죄자의 신상을 가차없이 공개하는 미국에서 이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은 "센트럴파크 파이브"라는 이름으로 미국 전역에 공개됐다. 드라마는 의도적으로 도널드 트럼프를 부각시키는데, 그는 사건 당시 -심지어 판결 전에- 이들을 모두 사형시킬 수 있도록 미국이 사형제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신문 전면광고로 배포할 정도로 이 사건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가 여성 인권에 별 관심이 없는 인간임을 고려하면, 그는 물론 감히 유색인종이 백인을 건드린 데 분노한 것일 테다. 이 드라마의 1부는 여기까지를 다룬다.
이렇게 재판도 전부터 미국 사회는 이들을 범죄자로 단정짓고 있었지만 공판은 의외로 아이들에게 유리하게 흘러간다. 아이들은 정말로 단지 주변에 있었을 뿐이므로, 경찰과 검사가 가져온 증거들은 모두 이치에 맞지 않는 것들이었고, 다섯 아이가 서로 격리된 채 다섯 경찰에 의해 조작되고 강요된 자백을 했기 때문에 '공범'으로 기소된 이들의 말은 서로 모순적이었다. 아이들이 각각 체포된 장소 역시 범행현장과 다소 거리가 있었고, 정황상 사건 시간은 아이들이 범행을 저지를 수 없는 때였다. 누구나 무죄를 예상하고 있을 때, 백인들이 다수를 이룬 배심원단은 아이들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여기까지가 2부.
미성년자인 15세였던 아이 넷은 소년원에 갔고, 성인으로 분류된 16세였던(사실 그는 15세이지만, 역시 빈곤하고 배우지 못한 부모가 출생신고를 잘못한 탓에 16세로 신고된 것이었다) 아이는 교도소에 갔다. 아이들은 미국에서 너무 유명했고, 소년원과 교도소에서도 그들은 백인 간수들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10대들이 감당하기엔 너무 괴로운 나날이 이어진다. 형기 동안에도 아이들은 때때로 죄를 인정할 것을 요구받지만 아이들은 그때마다 거부한다. 그들이 잘못한 것이 아니기에, 그들의 동료들도 어디선가는 진실을 지켜나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에. 그래서 아이들은 가석방되지 못하고 형기를 다 채워 나간다.
소년원에 있던 아이들은 출소한 이후에 나름대로의 삶을 꾸려나간다. 하지만 다들 순탄치가 않다. 1급 성범죄자로 분류됐기 때문이다. 역시 미국의 법은 한 번 유죄로 선고된 이들에게 만만치 않다. 특히 유색인종이 자주 저지르는 범죄들에 대해서는 유독 더욱. (이에 대해서는 <미국 수정헌법 제13조>를 보라.) 취업의 조건이 너무나 까다로웠고, 애초에 가진 것도 거의 없다시피 했던 세 아이들은 그럼에도 범죄의 길로 들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간다. 한 아이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재혼해 다시 꾸린 가족들은 모두 그 아이를 경멸했다. 그래서 나와 살아야 했는데, 그러려면 너무 큰 돈이 필요했다. 아이는 마약을 밀매했다. 그러다 적발돼 다시 감옥에 갔다. 여기까지가 3부.
교도소에 간 아이는 14년을 꼬박 살아냈다. 이 아이의 형기는 정말 끔찍하게 묘사된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엄마뿐인데, 아이가 복역한 교도소는 엄마의 집으로부터 500km 이상 떨어져 있다. 역시 가난한 보호자였던 엄마는 일을 해야만 하루하루를 넘길 수 있었고, 500km 이상을 달려올 여유는 자주 없었다. 그래서 이 아이는 가장 고독한 형기를 지낸다. 백인 간수는 노골적으로 뇌물을 요구했고, 뇌물 줄 돈이 있을 리 없었던 아이는 간수의 방치 속에 백인 수형자들에게 린치 당하기 일쑤였다. 조금이나마 엄마에게 가까운 교도소에 수감되기 위해 수차례 이감 신청을 했다. 그때마다 그는 "내 불운도 이쯤이면 다 했겠지" 읊조리며 기대를 걸지만, 거리는 오히려 멀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형기가 14년이 다 되어가던 즈음에야 진범은 자백한다. 무기수로 형기를 살면서 종교에 귀의한 그는 이제야 용서를 빌 용기가 생겼다는 것이다. 진범의 등장에 따라 뉴욕 경찰은 사건을 재수사하는데, 당시 사건을 악의적으로 끌고간 경찰들은 여전히 그들이 잘했다고 뻐겨댄다. 당시 진범은 불과 몇 달 뒤 다른 강간사건으로 체포됐는데 범행수법이 똑같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가 진범인지 여부를 묻지 않았다. 당연히 흑인 아이들이 범죄자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정의가 지연됐다. 14년간이나. 아이들은 그 14년을 지옥 속에 살았는데. 마침내 그들의 결백이 세상에 알려지고, 아이들은 그제야 당당하게 세상에 나와 함께 손을 흔든다.
그들은 이미 성인이 되었지만 내가 자꾸 아이라고 부르는 것은 교도소의 한 장면이 떠올라서다. 그는 이제 20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마음은 체포된 당시의 나이를 벗어나지 못한다. 거울 속에는 체포될 당시의 그가 있다. 고립 속에 그가 끊임없이 상상하는 것은 범행현장 주변에 놀러가기로 한 그 결정을 바꾸는 장면이다. 내가 그때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때 가지 말라고 한 여자친구의 말을 들었다면, 하면서. 무죄인 그들은 십수년의 시간 속에 결국 그들 자신을 탓하는 수밖엔 없었던 것이다. 여기까지가 4부.
'센트럴파크 파이브', 아니 '무죄 파이브'(오프라 윈프리는 이들을 이렇게 불러야만 한다고 얘기했다고 한다.)는 지금도 잘 살고 있다. 그들 중 하나는 대학에 가 수사에 관한 인권정책을 연구하고 있단다. 그리고 교도소에서 형기를 살아내야 했던 한 사람은 자신의 이름으로 된 기관을 만들어 그처럼 억울하게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들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단다. 한국에서도 간첩이니 하는 것으로 조작되어 억울한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재심 판결로 보상금을 받아 그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지원하는 데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억울한 사람들의 시각은 그들을 억울하게 만든 사람들의 시각보다 훨씬 더 넓고 포용적이며 성찰적이다. 나는 늘 이 지점이 놀랍고 존경스럽다.
영어 원제는 "When they see us." 드라마 끝나고나서야 생각했는데, 중의적인 제목이다. us는 '우리'(=유색인종)이면서 미국이다. us가 '우리'일 때 they는 주류 백인들이다. 그들은 유색인종을 이렇게 바라본다는 것이다. us가 미국일 때 they는 유색인종들이다. 유색인종들이 바라보고 겪고 있는 미국은 이런 것이라는 얘기다. 주류 백인들은 결코 알 수 없을 그런 미국의 이면을 유색인종들은 매일같이 경험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래 사진에는 성조기가 그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