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했던 그때,
오랜만에 차 안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이토록 소중한 일상인데.
그리고 나는, 육아 휴직 중이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에겐 필연적으로 금요일 밤이 설렌다.
금요일 밤에 뭐 하지, 주말에 어디 가지, 이번 주말엔 영화나 드라마를 정주행 해볼까.
우리도 그랬다.
금요일 밤엔 괜히 집 앞 번화가를 향했다.
외식을 하고, 후식을 먹고, 영화관을 기웃거렸다.
그래서 금요일 퇴근 시간만 기다렸다.
지금도 금요일 저녁.
지금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 하나 있긴 하다.
아이 재운 후 누리는 육퇴.
이 기다림도 소중하다.
그런데 아무래도 잔잔하다.
그래서 그때가 그리워졌다.
둘이서만 누렸던 온전한 휴식,
둘이서만 걸었던 집 앞 공원 산책길,
주말을 기다리며 설렜던 감정,
주말 데이트 코스를 그리며 했던 행복한 고민,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하는 밤마실, 그때의 공기, 자유. 모든 것이 그리워졌다.
지금은, 그때의 우리가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순간이므로.
너무 간절해서 눈물 날 정도로 바라고, 또 바랐던 '언젠가'이므로.
문득 내가 초심을 잊고 지냈구나, 생각이 들었다.
내내 노심초사했다.
행동 하나에도 행여 아내에게 영향이 가진 않을까,
또 그 영향이 아이에게 미치진 않을까.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약 16주, 네 달여 동안 긴장을 하다 보니 우린
지치고 피로했다.
그래서 간절했다.
제발, 최대한 늦게 태어나다오.
제발, 응급 상황엔 대형병원에서 우리를 받아다오.
제발, 무사히 태어나기만 해 다오.
제발, 산모가 건강해다오.
간절함이 통했을까.
뾲뾱이는 건강하게 우리에게 다가왔고,
아내는 건강하게 회복했다.
이후 여건 상 육아휴직이 간절한 때엔
제발 휴직 신청을 큰 이슈 없이 할 수 있게 해 다오, 하고 빌고 또 빌었다.
그리고 이 역시 그대로 행해졌다.
그렇게 간절히 바랐던 일들이 하나, 하나 이뤄져
부끄러워졌다.
오늘은, 어제의 내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 일 테니.
무엇보다 '뾲뾲이 낳아 건강하게 잘 키우기'가 핵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