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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항수 Jun 25. 2022

적대에서 우정으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의 '보복성 비인간화'와 관련하여

사랑과 애정에 영향을 미치는 호르몬으로 알려진 옥시토신은 극도로 높은 공격성과도 관련이 있다. 갓 출산한 동물들이 주변 환경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떠올려보면 하나의 요인이 어떻게 양면적 성격을 가지는지 연결시키기 쉽다. 즉 깊은 사랑과 폭발적 분노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옥시토신에 대한 설명이 없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경향성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있다. 자신과 유사한 정체성을 지닌 집단(국가, 인종, 계급, 성적 지향, 정치 성향, 종교, 혈연, 취향 등)에 애정이 있을 수록 그 집단이 공격받았다고 판단하면 매우 높은 적개심이 솟구치는 걸 자신의 삶이나 주변의 사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공격받았다는 판단은 신체적 폭력, 정서적 학대, 경제적 피해 등 다양한 요인에서 기인할 수 있지만 가장 강렬한 요인은 ‘그들이 먼저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인식, 즉 비인정(non-recognition)이다. 


비인정으로 인해 높아진 적개심은 상대 또는 상대 집단을 인간이 아닌 존재,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며 평소보다 잔인한 행동조차도 거리낌없이 하도록 만든다. 이를 보복성 비인간화(reciprocal dehumanization)라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왜 그리도 따스하고 인정많은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의아할 정도의 적개심을 보이는지를 설명해준다. 


바야흐로 다양성의 시대다. 차별받는 인종, (비정규직) 노동자, 성소수자, 장애인 등 지금까지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수많은 ’비정상’으로 여겨졌던 인간들이 나 역시 동등한 인간이라며 외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내세울 수록 과격한 제노포비아도 늘어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나는 이 현상을 일종의 순환적 보복성 비인간화로 바라보고 있다. 역사적으로 특정 집단을 비인간이라고 바라봤던 이들과 그동안 비인간으로 취급받던 이들 중 적개심을 과격하게 표현하는 경우, 특히 상대를 인간답지 못하다거나 비정상으로 상정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밖에 없고 이는 적대 관계의 강화로 이어진다. 


‘다양성을 수용하는 것이 옳다’고 단언하면 과연 이 갈등이 해결이 될까? 새로운 관념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이성적 활동에 가깝다. 단순히 대뇌피질에 새겨진 정보는 감정, 더 나아가 정동(affect)의 차원에서는 즉각 반영되지 않는다. 즉 머리로는 그게 옳다고 생각하나 자동적인 신체, 정서적 반응은 그렇지 않게 나타나는 셈이다. 고백하자면 나의 경우 부끄럽게도 아직 피부가 매우 검은 분을 만났을 때 약간의 위화감을 느낀다. 다문화주의를 제법 공부했고 다양성의 인정을 매우 중요시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렇다. 이렇듯 이성과 감정의 괴리는 쉽게 매워지지 않는다.


감정과 정동을 가장 쉽게 변화시키는 방법은, 당위적 지식의 습득이 아닌, 이전의 관계보다 더욱 강한 관계를 생성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관계를 변화시킴으로써 상대에 대한 기존 감정을 다른 감정으로 치환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과 교우했지만 유독 피부가 매우 검은 분들과의 교류는 거의 없었다. 만약 내가 그들 중 누군가와 우정을 나눌 수 있다면 그들을 접할 때의 위화감은 쉽게 변할 것이다. 이는 단순한 사고 실험이 아니다. 실제로 자신의 자식이 성소수자거나 장애인과 우호적 관계를 맺을 때 해당 집단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는 사례가 다수 존재한다. 


아쉽게도 내 주변에는 피부색이 그리 다르지 않은, 한국을 국적으로 가진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성소수자와 장애인은 손으로 꼽을 정도이고 기독교, 천주교, 불교 외의 신자가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없을 정도다. 나는 매우 동질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다양성에 대한 인정이 인식을 넘어 정동과 감정 차원에서 전환되기가 쉽지 않다.


만약 우리 주위에 여러 면에서 이질적인 사람들이 다수 있다면 어떨까? 그들과 자연스럽게 우정을 맺으며 살아갈 수 있다면 말이다. 서로가 의도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색을 드러내고 또 그것을 그저 다른 매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다양성이란 말조차도 필요없어질지도 모른다. 따라서 다양성의 수용을 강조하는 것을 넘어 다양한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순환적 보복성 비인간화의 고리를 끊는 길이라 할 수 있다.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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