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통 밥그릇 공무원 NO, 커피 볶는 아저씨 YES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평일 오후는 분주했다. 커피를 내리는 사람도 즐기는 사람도 안정감이 느껴졌고 즐거워 보였다. 주문을 받는 직원의 친절한 말투와 행동에서 손님을 대하는 진심이 보였다. 갓 구운 빵과 신선한 원두커피, 점심 이후 티타임을 즐기기 위한 직장인들, 주변에 사시는 마을 분들,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커플, 나처럼 혼자 카페에 온 사람, 모두가 여유로운 시간을 즐겼다.
커피 볶는 아저씨 모리노코에 간판 때문인지 잘 알던 지인을 만나는 기분이 들었다. 커피가 맛있는 집, 빵이 맛있는 집 이곳을 운영하는 고종오 대표와의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출, 퇴근하면서 무언가를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주변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사표를 내고 자유인이 되었다. 그날을 아직 잊지 못한다. 행복한 삶을 찾기 위한 첫 발걸음에 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안정된 환경에서 나를 쏙 빼버리고,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시간 위에 나를 태웠다. 매일 하루 만 원을 들고 제주 올레를 걷기 시작했다. 제주에 살면서 미처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좋은 곳에 내가 살고 있었는데. 아름다운 곳은 정작 그 안에서는 느끼기 어렵다더니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니 비로소 보였다.
제주도는 오름의 왕국이라 불린다. 약 360여 개의 오름. 오름은 높지 않지만 제주도 사람들의 삶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고, 몸을 낮추고도 충분히 제주스러움을 볼 수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야 정상에 올라갈 수 있는 오름의 여왕 다랑쉬 오름,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이 있는 용눈이 오름, 한라산의 산정호수 백록담 다음으로 가장 높은 사라 오름, 세계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자연 그대로의 거문 오름, 늘 잔잔한 물이 고여있는 물영아리 오름 등 오름을 오르내리던 길에서 나와 제주도의 자연뿐만 아니라 커피도 함께였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오름의 능선이 이어졌던 커피는 내 안의 무엇인가를 끌어올리며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후 나는 제주도에서 강원도로 커피 기행을 떠났다. 커피 맛을 따라가다 보니 이제 막 오픈한 강릉의 테라로사에 다다랐다. 그곳은 섬이라는 특성에 맞게 종류가 한정된 제주도의 커피와는 다르게 내가 미처 접해보지 못한 커피 세계가 응집되어 있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다양한 커피 세계로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발판이 된 곳이다.
나는 그때부터 커피 본질을 찾고자 해외를 정기적으로 다니게 되었고, 커피 인과의 모임을 가지며 커피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같은 목표를 위해 오름길에 동행하는 동력자들이 있어 힘든 것도 이길 수 있었고, 즐거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커피가 맛있는 집이 되려면 매일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과 보다 가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주도 특성상 여행자들이 스쳐가는 곳에는 카페가 많다. 하지만 주택과 상업공간이 있는 곳에는 쉽게 카페를 차리기 어렵다. 커피 맛이 없으면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이다. 처음이지만 무모한 도전이었고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만큼 커피 맛에 확신이 있었다. 주변 상권이 형성되어 있지 않을 때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때 노하우들이 하나 둘 쌓이면서 주변 상권과 함께 성장해갔다. 내가 내린 커피가 맛있어서 질 즈음에는 주변도 정리되고, 카페도 지금처럼 잘 되기 시작했다. 요즘의 카페는 동네의 사랑방 역할도 하고, 직장인들이 잠깐씩 쉬어가는 휴식공간이 되기도 한다. 주말이면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 여행자들이 커피 맛을 찾아 일부러 들르는 카페가 되었다.
카페에는 로스팅 작업장과 매장이 분리되어 있다. 매일 아침 신선한 원두를 직접 볶는다. 그보다 이른 시간 베이커리 팀은 그날 판매할 양의 빵만을 굽는다. 이렇게 카페 하루가 시작된다. 커피는 에스프레소와 핸드 드립 두 가지 형태로 준비되어 있다. 카페를 자주 방문하는 고객이라면 나를 믿고 오늘의 커피를, 음미하며 즐기는 고객이라면 바리스타의 손맛이 들어간 핸드드립 커피를 선택한다.
갓 로스팅 한 원두는 매장에서 구매도 가능하다. 커피 이외에도 매장에서 매일 크림치즈를 만들어 만든 크림 치즈빙수와 녹차빙수, 한 달에 한 번씩 어머님과 아내가 생강과 레몬을 깨끗하게 다듬고 한라산 꿀을 넣으며 정성껏 만드는 생강차와 레몬차, 시원하고 상큼한 에이드도 있다.
시즌이 오기 전 6개월 전부터는 신메뉴 개발을 한다. 정식 메뉴로 올려지기까지 다양한 검증 절차를 거치기 때문에 판매되는 메뉴보다 중간에 사라지는 메뉴가 훨씬 더 많다. 제주도민이기에 가급적이면 제주도에서 나는 원재료를 사용하려고 노력한다. 대표적인 메뉴로는 제주 한라산에서 채집한 꿀과 제주산 생강을 넣어 만드는 생강차, 제주에서 나는 블루베리로 만드는 수제 요거트가 있다.
카페로 향하는 출근길이다.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다. 출근길이 이렇게 가볍고 즐거울 수 있다니. 출근 후 로스팅 한 커피 한 잔을 마실 때 참 행복하다. 날이 좋아도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커피를 내리고 커피로 힐링 한다. 여인의 향기보다 매혹적인 커피 향에 취해있을 때 나는 휴대폰을 꺼내 그날의 행복한 일상을 담는다. 커피 볶는 아저씨 페이스북에는 모닝커피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3년 후 모리노코에는 새로운 카페를 오픈할 예정이다. 맛있는 커피와 일상의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카페를 만들기 위해 건축, 인테리어 등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늘 그랬듯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하고, 느끼게 된 결과물을 토대로 제2의 카페 행복한 모리노코에(숲의 소리)에서 행복한 사람의 소리를 담아낼 작정이다. 오픈하면 꼭 초대하고 싶다.
예고 없이 사표를 내고, 하루 만 원을 가지고 올레길을 다녀도, 강원도로 커피 원정을 떠나도, 세계 커피 산지를 가도, 늘 한결같이 지켜봐 준 가족이다. 가족의 응원이 없었더라면 지금까지 달려오지 못했을 것이다. 묵묵히 한 길을 갈 수 있게 도와준 여러 사람들의 격려가 있었기에 제2의 모리노코에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정년퇴직이 보장되었지만 즐겁지 않았던 철통 밥그릇 공무원은 사라졌다. 그 대신 정년 없이 평생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철통 밥그릇 커피 볶는 아저씨로 다시 태어났다. 즐겁게 일하는 그의 모습은 3년 후에도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현재 진행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