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의미
중2병이라면 중2병이겠는데, 어렸을 때는 나름 이상적인 꿈이 있었다. 현명한 사람이 되는 것. 세상 모든 의문부호에 마침표를 던져줄 수 있는 사람. 불사의 존재에 매료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유한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죽지 않고 사는 건 인간으로서 무엇보다 매력적이라 믿었다. 대략 천 오백 년쯤 살고 보면, 썩어 없어질 유기체의 모든 맹점을 극복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 있지 않을까 하고.
그러다 사무라 히로아키의 <무한의 주인>을 접했다. 불사에 대해 조금 다른, 흥미로운 관점을 던져준 작품이다. <무한의 주인>의 주인공 만지는 ‘혈선충’이라는 티벳의 비술로 죽지 않는 몸이 됐다. 그는 뱀파이어 같은 불로불사 캐릭터의 탐미적이고 권태로운 이미지와는 완전히 대척점에 서 있다.
애초에 이 만화는 일본도를 차고 무사도를 읊는 사무라이가 아닌, 저잣거리에서 굴러먹는 낭인들 이야기다. ‘일대일 싸움이라면 어떤 무기를 쓰든, 어떤 방식으로 이기든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모토를 지닌 아노츠 카게히사의 일도류는 검술 유파라기보다 야쿠자 집단 같다. 쌍신도, 삼지창, 도끼, 사슬낫, 갈고리 등 별별 희한한 무기가 다 등장하고, 모든 싸움은 진흙탕에서 뒹구는 악다구니다. 무슨 수를 쓰든 내가 살고 네가 죽으면 된다는 식이다. 이런 싸움 와중에, “죽지 않는 몸이 되니 검술이 자꾸 무뎌진다”는 만지의 말처럼, 그의 몸은 점점 도구화가 된다. 그러니 싸움에 ‘간지’ 같은 게 있을 턱이 없다. 매번 사지가 날아가고 배가 갈라진다. 죽지만 않을 뿐이지 고통은 똑같이 느낀다.
2권에서 만지는 자신과 똑같이 혈선충을 지닌 일도류 검사 시즈마 에이쿠와 싸운다. 두 사람이 칼로 서로의 심장을 꿰뚫는 장면은, 작가 특유의 카리스마적인 작화까지 더해져 충격적이었다. 이 모습은 <무한의 주인>의 테마를 가장 확실하게 담고 있는 장면이다. 육체가 그저 도구가 되고, ‘목숨을 건다’는 인간적인 조건조차 내세울 수 없는 그들의 싸움은 공허 그 자체이며,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건 고통 뿐이다.
무려 이천 년을 살았다는 시즈마는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유한한 인간‘에 불과한 아노츠를 제거하고, 만지를 회유해서 불사자끼리 진정한 일도류를 결성하고자 한다. 그는 만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다른 사람에게 혈선충을 줄 수 있었다면, 나는 아무도 잃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 깨달은 거지. 필요한 건 처음부터 나와 같은 인간 뿐이란 걸.”
모르겠다. 시즈마가 몇 만 년쯤 더 살았다면 어땠을까. 그때는 ‘불사의 존재가 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 마음을 죄다 도려내서 고통에도 무감각해지고, 허무에 잠식당하지도 않는 완전체로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라기엔 너무 낯선 강인함이다. 죽지 않는다는 건 만능에 가까운 능력이지만, 그걸 담고 있는 그릇은 인간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에 뒤통수 맞은 기분이었던 기억이 난다.
무한한 생명은 한없는 자유, 한없는 자유는 절대적인 고독이다. 오히려 인간은 무한을 끌어안고 소멸할 수 있기에 그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연재가 이십 년이나 이어지면서 특유의 분위기는 사라지고 이능력자 배틀물이 되어버렸지만, 그 찰나에 스쳐간 서늘한 깨달음은 아직도 뇌리에 희미하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