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주인공의 페이소스
고등학교 때 수업과 야자시간에 만화를 보는 모임이 있었다. 물론 책상 아래에서 은밀하게 행해지는 ‘범법’이었고, 모임은 자연스럽게 비밀결사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십시일반 곗돈을 각출하여 공급책에게 건네면 그가 근처의 대여점을 돌며 물건의 반입과 유통을 담당하는 시스템이었다.
같은 중학교 출신의 5명으로 시작된 조직은 점차 확장됐는데, 나중에는 흡사 중남미의 마약 카르텔 같아졌다. 작품을 1차적으로 선별하는 공급책의 안목이 높은 수준이었고, 잠잘 시간도 줄여가며 만화를 보는 인간들의 채에 걸러진 것이었기에, 그들 사이에서 입에 오르내리는 인기 차트는 꽤 신뢰도가 높았다. 우라사와 나오키, 니시모리 히로유키처럼 그때만 해도 입지가 지금 같지 않았던 작가들을 나에게 전도한 것도 그들이었다.
당시 인기 차트에서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은 화제의 뒷전으로 밀려나는 법이 없었다. 다만 극과 극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은 환장을 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아예 싫어하는 게 특이했다. 나는 후자 쪽이었다. 정교하고 카리스마적인 작화에 신봉에 가까운 감정마저 가지고 있었던 사람에게, 단조롭고 매가리 없어 보이는 그의 그림체는 애초에 호감이 갈 수가 없었다. 산짐승에 옷 입혀 놓은 것 같은 십대의 수컷들에게 그의 작품이 어떤 코드로 어필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지금도 아주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다)
나중에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을 보게 되면서 생각한 건, 아마도 ‘소년 판타지’의 충족이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 같다. 아다치 미츠루는 자신의 작품에 나오는 남자주인공들에게 늘 최선의 행복(=사랑)을 안겨주었다. 야구 실력이나 복싱의 재능을 빼면 변변한 구석 없는 흔해빠진 남자주인공이 결과적으로 행복해지는 것, 그것이 고정된 패턴 같은 것이었다. <러프>처럼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는 쪽이든, <미유키>처럼 반대로 자신이 선택하는 쪽이든, 혹은 <터치>처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쪽이든.
절친이자 일생의 라이벌인 괴물투수 히로와 천재타자 히데오, 어려서부터 히로와 남매처럼 자라온 히데오의 연인 히까리, 그리고 히로를 좋아하는 하루까. 시간이 흐르면서 세 사람 사이에는 미묘한 감정의 기류가 흐르고, 최종회에 이르러 히로와 히데오는 갑자원에서 운명적인 대결을 펼친다. 그리고 9회 마지막 승부에서 히데오를 삼진으로 멋지게 꺾는 히로… 통속적인 드라마가 될 요소는 다 있다. 잔뜩 닳아빠진 진부한 패턴이긴 해도, 늘 정해진 루트를 따라 당연한 해피엔딩에 이르는 과정의 팽팽한 텐션을 그려내는 것이야말로 작가의 재능이었다. 그러니 히로는 행복해져야 했다. 지금까지의 패턴에 따른다면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H2>의 완결편인 34권을 처음 봤을 때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마치 작가들이 연재를 급하게 얼버무려 끝낼 때나 보일 법한, 도무지 납득이 안 되는 결말이었기 때문이다. 나만 그렇게 본 것도 아니었다.
그 전모를 알게 된 건 아주 나중의 일이다. 얼핏 사각관계나 삼각관계로 보이지만, 사실 <H2>의 모든 것은 결국 히로와 히까리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열쇠는 히로에게 있었다. 복선을 활용하는 능력이 탁월한 작가답게 아다치 미츠루는 작품 초반 중요한 힌트를 심어두었다. 히까리 어머니의 대사다. “만약 히로와 히데오가 시합에서 맞붙게 된다면 누가 이기든 가슴 아플 거예요. 히까리는 진 쪽의 마음을 먼저 생각할 테니까.”
만약 마지막 시합에서 히로가 히데오에게 졌다면 세 사람의 감정의 파고는 지금까지처럼 계속, 괴롭게 이어져야 했을 것이다. “애초부터 내게 선택할 권리 같은 건 없었다”는 히까리의 말처럼, 선택은 히로가 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히로는 이겨야만 했고, 승부에 집착하지 않는 평소의 자신을 지우고 철저하게 이기기 위한 투구를 했다. 그 스스로 “이렇게 괴로운 야구는 처음”이라고 토로할 정도로. 그것은 질질 끌어온 감정의 고리를 끊고 히까리를 포기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가 시합 도중 포수 노다에게 “나를 너무 믿지 마”라고 말한 것은 히데오에게 차라리 져버리기를 바라는 마음 한구석의 진심인 셈이다.
그러나 자신의 투구를 쳐낸 히데오의 홈런성 타구가 아슬아슬하게 파울이 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이겨야만 한다는 건가?”라고 체념한 히로는 히데오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싸움을 마무리 지었다. 히까리를 선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내려놓기 위해, 자신이 히까리의 키를 따라잡으면서 시작된―델리 스파이스의 5집 수록곡 <고백>의 모티브인―길고긴 싸움을 끝내기 위해. 그리고 히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히까리는 이런 히로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히로와 히데오의 대결이 결승이 아니라 준결승이었던 것도 히로가 체념하고 돌아서는 무대로 더 어울리기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이 결국 맺어지지 않은 것은 의외의 결과였고, 행복해지지 못한 남자주인공은 말했듯이 작가가 스스로 패턴을 이탈해버린 것이었다. 말하자면 해피엔딩보다는 페이소스였고, 익숙한 패턴을 기대했던 팬들에게는 다소 난해하고 떨떠름하게 받아들여질 만했다. 그것이 매너리즘에서 벗어나려는 반작용이든, 혹은 작가 자신의 경험이나 감정이 개입된 것이든 말이다.
아다치 미츠루의 다른 작품에 나오는 캐릭터들은 이름도 얼굴도 까마득하다. 복에 겨운 그들에게 굳이 감정이 투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개중에서 히로는 유례없이 뚜렷한 흔적을 남긴 캐릭터가 되었다. 행복이라는 감정에는 이유가 중요하지 않다. 굳이 이유를 물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 정확하겠다. 그러나 쓸쓸함이나 외로움은 계속 그 이유를 되묻게 만들고, 곱씹을수록 꼬리가 길어진다.
히데오와의 승부가 끝난 뒤 결승 전날, 팀원들과 뒤풀이 자리에서 무리해서 즐겁게 노래하는 히로는 너무나 쓸쓸한 주인공이었다. 그가 불렀던 노래는 유즈(Yuzu)의 98년 곡 <夏色(여름색)>이다. 모르고 들었을 때는 그저 발랄무쌍한 곡이었는데, <H2>를 이해하고 나니 달리 들린다. 애써 즐거운 척 하기에 더없이 좋은, 외로움을 살짝 건드리는 어둡지 않은 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