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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경 Dec 09. 2022

발리 여행을 준비하며

유서를 쓰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기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한 달 남짓의 발리 여행을 앞두고 나는 많은 것을 정리하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 


주로는 정기적으로 등록해서 나가는 수업 선생님들에 대한 수업 일정 중단의 통보. 연기 선생님, 디제잉 선생님, 크로스핏 선생님. 명상 선생님, 그리고 아직도 통보하지 못한 한 사람은 비정기적으로 일정을 잡아 수업을 진행하는 서핑 선생님이다. 그 분의 경우 영 애매한 것이 보충수업을 30분을 더 해주겠다고 배려하는 차원에서 추가 수업을 잡아주셨지만 서로 일정을 잡지 못한 상태에서 내가 발리를 가게 되었고, 과연 그의 배려가 발리 여행 이후에도 유효할지 혹은 그의 마음속에 있는 일정 기한의 경과로 무효가 될지 미지수이다. 이런 대화로 맞추어야 하는 부분이 있어 생각만 해도 골치가 좀 아파 아직 연락을 드리지 못하였다. 아무튼 출국 전에는 연락을 드리긴 할 것이다. 




오늘 한 달 치 선결제해 둔 디제잉 수업의 마지막 회 차를 마쳤다. 수업을 마치고 연습실에 남아 연습을 하는데, 특히 열심히 연습을 다녔던 지난 한달 남짓의 기간이 떠오르면서, 어쩌면, 내가 발리를 다녀와 디제잉 수업을 지속하지 않게 되면 이게 마지막 연습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간 선생님과 보낸, 그리고 혼자 연습실 안팎에서 보낸 시간들이 몹시 찬란하게 느껴졌다. 직업으로 가져갈 수 있는 시기도 요원해 보이는데 대체 언제까지 비싼 개인레슨비를 지불하고 레슨을 이어나가야하는지 답답함과 이런저런 환경에 대한 불평, 불만이 가득했던 시간. 그냥 이걸 할 때 내가 즐겁고, 선생님 성격도 마음에 들고, 뭐 그럼 되지 않은가. 뭐가 그리 ‘근데’가 많이 붙었는지. 어리석은 자여. 


그렇게 오늘 차 레슨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 ‘마무리’에 대한 생각이 들자마자 내가 지금 ‘집’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향하는 행보조차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렸다. 그건 살고 있는 집의 전세계약기간이 끝나가기 때문이다. 여행을 와 흠뻑 반해 1년만 살아보자고 덜컥 계약한 이곳, 부산 송정해수욕장에 자리한 전셋집. 순탄치 않은 한 번의 계약 연장이 있었고, 두어 달 전, 연장한 기간의 종기가 도래했었다.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한 번의 연장을 더 하되 실거주를 목적으로 하는 매수인이 있을 경우 1년 내에라도 언제든지 이사 나가는 조건으로 합의했다. 


위와 같이 합의하기 얼마 전, 별 진지한 얼굴을 하지 않은 아저씨 하나가 집을 보러 왔었고, 그 후 두 달이 넘도록 집을 보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겨울이 시작된 지금, 이 추운 날씨에 이사를 위해 집을 보러 오는 사람은 없으리라. 예상컨대 봄쯤이 되면 누군가가 집을 보러 오고 나는 슬슬 이사 갈 집을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 발리에서 한 달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면 체감 상 그 시기는 훅 앞당겨져 있을 것이다. 


그렇게 레슨실에서 집으로 향하는 동안, 이 집에서 하루라도 더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며 발리 여행을 너무 길게 다녀오지는 말아야지 하는 다짐을 해 보았다. 이 집이 나에게 주었던 안락함, 쾌적함, 따뜻함, 그리고 이 넓은 집에 수많은 사람들을 초대해서 보내었던 행복했던 시간들이 잠시 머릿속을 스쳤다. 송정 바다가 보이는, 운동장만한 거실을 가진, 벽과 바닥, 기둥이 고급스러운 나무 장식을 띈, 이 멋지고 좋은 집에 살면서도 나는 행복하지 않았던 하루가 너무나도 많았다. 




잠시 이곳, 부산 송정해수욕장을 떠나는 나는, 이번 한 달이 지나고 나면 이 집과의 인연도 다 해갈 것 같다는 두려움에 마치 송정을 영영 떠나는 것과 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다. 잠시 집에 들러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간 크로스핏 체육관에서도, 그 공간이 주는 분위기, 선생님들과의 인연을 다시금 되새겨보다, ‘이만하면 괜찮지, 괜찮은 사람들이지’하며 나왔다. 


내가 만나는 사람, 겪는 일들, 그 전에 눈뜨고 눈감고 살아가는 공간을 좀 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감사할 수 있는 기회들이 무수히 많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왜 그렇게 두 눈에 불을 켜고 불평거리들을 찾아다녔을까. 부산, 송정해수욕장, 그리고 이 집, 이곳에 살면 행복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곳은 결코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2년이 지나는 동안 예상했던,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예상하지 못했던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내가 일상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산에 살게 되기 전에는 내 삶에 관여하리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과 순탄한 관계를 맺으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 아무것도 잘못된 것은 없다. 예상치 못한 몇몇 큰일들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나는 즐거워 할 이유들과 함께 잘 살아가고 있다. 




얼마 전, 다큐멘터리를 통해, 후천적으로 시력을 잃고 시각장애인이 된 후 새로이 가정을 이루고 꿈꾸던 가수로 활동하며 살아가고 있는 40대 중반 여성의 이야기를 접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결코 시력을 잃기 전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 전의 삶은 그냥 주어져서 사는 것일 뿐 삶에서 어떠한 의미도 찾아내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시력을 잃은 이후, 그녀는 삶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찾아내며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 


똑같은 공간, 똑같은 사람, 그리고 똑같은 경험이, 이곳을 한동안 떠나있게 되고, 그 후 언젠가 영영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소중하고, 특별하고, 썩 멋진 것이 되어 다가왔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진부한 진리를 다시 한 번 깨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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