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자들은 이렇게 싸웁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의 일입니다. 옆자리 짝꿍은 장난이 좀 심한 편이었습니다. 저는 말수도 적고 조용히 공부만 하던 학생이었고요. 사실 전 이 짝꿍이 처음부터 내키지 않았습니다. 체격이 저보다 훨씬 컸고, 어찌나 험상궂게 생겼는지 전 그 녀석이 소위 '일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그 녀석이 제 짝꿍이 되었다는 소식에 얼마나 절망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막상 짝꿍이 되어보자 생각만큼 그렇게 무섭거나 나쁜 친구는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장난끼가 많아서 좀 곤혹스러웠죠. 대부분의 사소한 장난은 저도 웃으며 받았습니다. 그러나 남자 고등학생들이 으레 그렇듯, 장난들 중에는 유사 몸싸움(?)과 같은 엎치락 뒤치락 하는 종류의 것들이 많았습니다. 똥침이라든지, 때리고 도망간다든지, 유도(?)를 한다든지, 레슬링을 한다든지, 난데없이 헤드락을 건다든지 하는 것들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체격 차이였습니다. 그 친구는 저보다 못해도 30kg는 더 나갔습니다. 키도 15cm 정도는 저보다 더 컸죠.
격렬한 장난에 체급 차이가 더해졌으니, 어떤 장난은 도저히 장난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더군요. 그 친구가 악의없이 한 행동이 제게는 너무 아프게 들어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몸집으로 눌리니 빠져나오기도 힘들고, 그러다보니 화도 내게 되고, 짜증도 부리고 그랬죠.
야, 그냥 장난인데 뭘 그리 삐지냐~
아니,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고, 개구리인 제 입장에서 그게 어떻게 장난이겠냐고요. 인정사정없이 헤드락을 걸어대는데 숨을 못쉬겠더라니까요. 그래서 어느 날은 제가 참다참다 못해 크게 화를 한번 냈습니다. 앞으로 이딴 장난 하지 말라면서 심한 말을 좀 했죠. 그랬더니 친구도 나름 서운한 부분이 있었나 봅니다. 결국 저희는 심각한 말싸움을 벌이게 되었고, 절교 선언이 나오기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렇게 싸움이 극에 치달을 즈음, 그런데 친구가 제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긴 말 할 것 없고, 이따 저녁 9시에 농구장에서 보자. 한판 뜨자고.
그 친구의 결투 선언을 전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렇게 말싸움은 끝이 났습니다. 짝꿍이었으니 계속 내내 옆자리에 앉아있긴 했지만 우리는 하교할 때까지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모른 체 했더랬죠. 하교 후 집에 와서 저녁 밥을 먹고 좀 놀고 있자니 어느새 저녁 9시가 가까워 왔습니다. 결투 시간이 임박한 것이었죠. 그런데 왠일인지, 저는 어느새 결투 장소에 가기가 싫어진 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길 자신이 없다? 그건 아니었습니다. 비록 체급에서는 밀리지만 작은 체구의 이점을 살려 스피드 전법 위주로 히트앤런을 하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보다는 말싸움 당시 격렬하게 제 머릿속을 지배했던 분노의 감정이 어느새 사그라든 영향이 더 컸습니다. 갑자기 회의감이 밀려오더군요.
'아니 내가 왜 싸운거지?'
'지금 생각해보니 고작 그런 걸로 싸운 게 우습다.'
'그 녀석 지금쯤 농구장에 나왔으려나? 에이 설마'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 농구장에 나갔습니다. 아까 낮에는 잔뜩 화를 내며 얼굴이 붉어졌던 그 친구가 데면데면 서있더군요. "어… 왔냐?", "그래, 넌… 언제 옴?" 서로 인사를 주고 받고 나서는 같이 밍기적 거렸습니다. 그러다 그냥 농구대 앞에 같이 주저앉았죠.
에혀, 내가 미안하다.
아냐, 나도 잘한 거 없지 뭐.
우리 왜 싸운 거지?
글쎄.
… 배고픈데 닭꼬치나 사먹고 갈래?
오케이. 내일 학교 끝나고 PC방 콜?
그렇게 우리의 결투는 허무하게 끝났습니다. 그때 그 친구와 저는 현재까지 약 20년 간의 우정을 이어오고 있는데요, 아직도 그 친구를 만나면 그 때 그 이야기를 꺼내곤 합니다. 그리고는 "그런 일도 있었지~" 하고 같이 웃죠. 당시에는 심각하기 짝이 없었지만,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서로 으르렁 댔지만 지금은 훌륭한 안주거리가 되고 말았지요.
살다보면 반드시 화를 마주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가족이든, 친구든, 직장 동료든, 서운함이 짜증과 분노로 발전하게 되고 상대에게 험한 말을 쏟아내기 시작하죠. 문제는 감정이 통제를 벗어난 순간입니다. 어떻게든 상대를 모욕하고, 짓밟아야겠다는 생각이 지배하기에 어떻게든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을 적극적으로 찾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후회하죠. 관계는 어긋나 버렸고요.
감정에 관해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은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조언하고는 합니다. 일단 감정이 지배하는 시간에서 벗어나라고요. 일단 분노가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하면 어떤 논리적인 대화, 이성적인 접근도 통하지 않기 때문에,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말하죠. 하지만 문제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을 때, 도무지 싸움을 여기서 그만둘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놔봐, 아 놔보라고!!
아 말리지 말라고!! 다 비키라고!!
그간 숱한 싸움을 직간접적으로 목격하면서 느꼈습니다. 그 자리에서 분노를 참고 돌아선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말입니다. 사실 고백하자면 저도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던 적이 있습니다. 누가 말리든 상관없이 어떻게든 끝장을 보려 했고, 끝이 나지 않을 걸 알면서도 계속 상대와 말싸움을 벌이길 주저하지 않았죠.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대안은 '결투 신청'입니다. '결투 신청'은 우선 분노 당사자들에게 '참아', '그만 둬' 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싸우지 말라는 게 아니라, 나중에 싸우라고 하는 거니까요. 그래서 분노하던 사람들도 '참아' 보다는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나중에 제대로 붙어'에 좀 더 납득을 합니다. 그리고 결투에서의 진한 복수(?)를 다짐하며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가능성이 높죠.
하지만 분노는 시간에 약합니다. 아무리 맹렬하게 타올랐던 분노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옅어지게 마련입니다. 그 사이 여러 가지 사건들로 인해 기쁨, 슬픔, 즐거움, 아쉬움, 흥미로움 등등 다른 감정들이 섞여 들어오기도 하고요, 싸움이라는 부정적인 기억을 마음 구석으로 밀어내고, 그만 잊어버리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가 '분노 사건'의 망각을 촉진시킵니다.
그렇게 마음이 가라앉는다면 정작 결투의 시간이 닥쳤을 때, 기껏 다시 만났더라도 이미 서로 간에는 싸울 동력을 상실한 지 오래입니다. 그 때 격렬하게 싸우던 서로는 어디갔는지, 왠지 어색하고 데면데면하죠. 싸웠다는 사실을 서로 잊기로 합의하거나, 이전보다 훨씬 더 차분하고 이성적인 태도로 갈등을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에 도달한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분노는 시간에 가장 약하거든요.
'결투 신청' = 시간벌이
정리해 보겠습니다. 누군가에게 화가 날 때 어떻게 하면 상처 없이 슬기롭게 갈등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차라리 상대에게 결투 신청을 하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참으세요', '기다리세요', '이성적으로 대화하세요' 이런 말들, 한창 싸우는 도중에는 듣지도 않으실 거잖아요. 그러니 싸우지 말라는 말은 않겠습니다. 그 대신 휴전을 제안드립니다. 확실한 날짜와 장소와 시간을 잡고, 제대로 만나서 싸울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시간을 벌다 보면
분명 냉정하고 이성적인 자신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