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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na Nov 25. 2015

딱 3분만 너와 얘기할 수 있다면!

고양이와 사람이 함께 사는 이야기

  

  지난 8월 8일 나는 기숙사에서 부랴부랴 짐을 싸서 도망치듯 상해에 도착했다. 방전 직전의 핸드폰 같은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해서 짐을 내려놓는 순간, 엥 넌 누구냐. 그는 파랑과 노랑의 중간 색깔의 큰 눈으로 나를 살피듯 쳐다보면서 슬금슬금 걸어와서는, 치켜세운 꼬리로 내 손을 스윽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인사의 의미로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순간 날카로운 발톱으로 샥- 할퀴고는 도망갔다. 살짝 부푼 손등을 긁적이면서 든 생각은 ‘귀엽다’ 보다는, '우리 집에 동물이 있다니' 이었던 것 같았다. 아무래도 좋지만은 않았던, 나와 우리 집 고양이의 첫 만남이었다.

 

  중국에 도착하기 전에, 우리 가족이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어릴 때부터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에 대한 로망 비슷한 것은 있었지만, 막상 우리 집에 새 식구가 들어온다는 것이 달갑지는 않았다. 신경 써야 할 게 하나 더 늘었다, 정도의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고양이를 키우는 것은 어항속의 물고기를 보는 것 마냥 간단한 일이 아닐 것 이라는 직감도 들었다.

 

 ‘왜 하필 고양이야,’ 사실 나는 고양이를 무서워하기도 했다. 적어도 나에겐 고양이는 공포의 대상이지 귀여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어릴 때 애드거 앨런 포의 소설 [검은 고양이]를 지나치게 진지하게 읽은 탓인지, 고양이의 매서운 눈빛은 책을 읽고 무서워 잠을 설치던 밤들을 떠올리게 할 뿐이었다. 또 길냥이들은 나의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기숙사에 올라가다 혹 길냥이를 마주치면 쫓아내기에 바빴다. 그래서인지 사실 나는 고양이를 마음 다해 돌보고 사랑스러워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고양이뿐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가끔 집에서 뒹굴 거리며 보는 TV동물농장은 재밌지만 유기견 보호소의 강아지들에게는 눈이 가지 않았다. 동물원으로 소풍을 가는 건 즐겁지만 불법 포획되는 돌고래의 울음소리나 멸종위기의 반달가슴곰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사람 사는 이야기만 듣기에도 충분히 피곤한데, 동물에게까지 신경 쓰는 건 사치라고 생각했다. 말 못하는 동물들의 세상에 관심을 기울이기에는 내 마음은 지나치게 퍽퍽했던 모양이다.

 


  이런 나에게 우리 집 고양이와의 만남은 가히 역사적이라 할 수 있겠다. 아무 계획 없이 중국으로 간 나는 역시나 아무 할 일도 없었다. 각자의 일상에 바쁜 가족들 틈에서 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거나 늘어지게 늦잠을 자거나 할 뿐이었다. 나는 자연스레 나와 비슷한 일상을 즐기고 있는 고양이에게 눈이 가기 시작했다. 쇼파에 널브러져있는 내 옆에 자연스럽게 누워 낮잠을 자는 그 친구의 머리를 용기내서 쓰다듬어 보았다. 그 다음에는 눈도 맞춰보고 (나중에 알고 보니 고양이는 눈을 가까이 마주보고 깜빡이는 눈키스를 좋아 한다고 하더라), 어느새 정신 차리고 보니 직접 바느질을 해 가며 고양이 장난감을 만들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이 곳 상하이에는 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이 참 많다. 옆집 아주머니는 마당에 캣하우스를 만들어 길냥이들을 돌보신다. 비 오는 날 떨고 있는 아기 고양이를 경비아저씨가 두툼한 외투 폭에 품고 있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다. 학교 친구들 중에도 버려진 아기 고양이를 입양하는 친구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고양이 카페’는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고양이를 기르는 카페도 두어 곳 발견했다. 말을 할 수 없는 고양이의 눈을 깊이 쳐다보며, 몸짓과 꼬리의 언어에 주의를 기울이며 소통하는 사람들을 보자면 이전에 내겐 없었던 여유가 이들에게는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 우리 집 최대의 화두는 고양이가 베란다에서 사느냐 집 안에서 사느냐이다. 집이 일 층인지라, 우리 고양이는 집이 지루하다 싶으면 마당으로 휙 튀어나가 다른 고양이들과 어울려 놀곤 한다. 집을 나간건가 싶어 상심하고 있으면 또 빼꼼 방충망을 뚫고 집으로 들어와 야옹- 하며 귀가를 알린다. 잔디밭에서 뒹굴다가 들어온 고양이와 함께 담요를 공유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마당을 드나들기 시작한 이후에는 베란다에서 재우곤 한다. 들어오면 나가고 싶어 하고, 나가면 들어오고 싶어 하는 고양이의 속을 알 길이 없어 무엇이 이 녀석을 위해 행복한 결정인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중이다. 딱, 3분만 고양이와 말이 통한다면 좋겠는데 말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물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만큼 소중한 일이기도 하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왕왕 이야기 하면서, 아파도 아프단 말 내뱉지 못하는 함께 살아가고 있는 동물들에 대해서는 지극히 무관심 했다는 것을 깨닫는 중이다.



  내 고민이 고양이에게 까지 미치다니, 아무래도 내 마음에 기분 좋은 여유가 조금은 생겼나보다. 뜨거운 히터 바람으로 빡빡하게 채워진 방에 신선한 바람이 한 줄기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다. 여전히 우리 집 고양이와는 말이 통하지 않지만, 이제는 적어도 각자의 언어로 이야기하며 그리고 들으려고 애쓰며 공생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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