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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성길 Sep 17. 2020

하나. 스크루지는 고추농사를 지었다

이렇게 나는 '돈 벌기의 어려움'을 너무 어린 나이에 알았던 것 같다. 나만의 고추 가마 환전 법은 어느 순간부터 사라졌지만 소비에 대한 인색함은 계속 남았다. 시간이 흘러 돈을 벌고 지금의 아내를 만나면서 돈 씀씀이는 조금 평범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택시보다 딱딱한 지하철 좌석이 훨씬 더 편하게 느껴지는건 어린시절 힘겨웠던 기억에 대한 마지막 예의가 아닐까 생각된다.

ep1.

[결제] 승인

56,000원

*팡


 핸드폰에 결제 알림이 왔다. 오늘도 아내는 어김없이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다. 분명히 "필요해서 샀을 거야"라고 머릿속으로 억지 주문을 걸어보지만 결국 가슴속 한편에 씁쓸함만 남는다. 혼자 살 때는 나만 아껴 쓰면 됐지만 결혼 후에는 내가 번 돈도 우리 돈, 네가 번 돈도 우리 돈, 즉 공유의 자산이 됐다. 그 공유 자산을 놓고 쓰려는 자와, 쓰지 않으려는 자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아~ 정말 구질구질해"


 마트에서 '오리로스'를 사자, 말자,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아내가 한 마디를 하고 말았다. 그 굴욕적인 말에 본능적으로 울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뭐? 구질구질하다고? 너 말 다했어?" 치욕스러운 마음에 무언가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나 스스로도 구질구질해 보였기에.. "오리로스 그거 얼마 한다고 먹든 버리든 그냥 살걸..." 속으로 후회했지만 이미 삐진 아내는 성큼성큼 달아나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그 뒤를 조심스럽게 뒤따라가는 내 모습이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


ep2.

 연초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연말정산, 지난 일 년간 사용한 카드값을 한눈에 확인하고 자기반성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다. 직장 동료들은 서로의 카드값을 비교하며 5~6천 나온 카드값에 놀라며 자랑스럽다는 듯이 떠벌린다. 그들 카드값에 절반밖에 되지 않는 내 카드값은 이유도 없이 스스로 작아진다.


"과장님은 카드값 얼마 나왔어요?"

"뭐하는데 돈을 그렇게 많이 써?"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치는 언술로 피해보려 했지만 꼬치꼬치 물어오는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그들은 나의 카드값에 놀라며 자신의 롤 모델이라며, 본받아야 한다며 이야기를 했지만 비아냥대는 것만 같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짠돌이로 통한다. 물론 내가 대놓고 스스로를 짠돌이라 얘기도 하지만 씀씀이가 헤픈 후배들에게 장난식의 훈계를 하면서 공인된 짠돌이가 됐다. 하지만  솔직히 '돈'에 인색하게 비치는 내 모습이 조금은 부끄럽고 창피하다.


ep3.

 오랜만에 옛날 근무하던 직원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기분 좋게 마시고 12시가 될 때쯤 내일 또 출근해야 하는 서로를 위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집을 나서며 재빨리 통밥을 굴려본다. "지하철 역까지 걸어서 5분, 막차는 10분 뒤니까 충분히 탈 수 있어" 혼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잰걸음으로 지하철 입구로 향했다. 하지만 그 순간, 사당 사는 후배가 아무렇지 않게 택시를 잡는다. 사당은 나와 같은 방향, "아~택시 타기 싫은데" 속으로 생각했지만 결국 아무 생각 없는 후배와 어쩔 수 없는 나는 같은 택시를 타게 됐다. 코스는 [안양 - 사당 - 군자] 사당에 사는 후배가 인사를 하며 내리자마자 계산에 들어갔다. 택시가 움직이는 이동 방향, 7호선 막차 시간, 군자까지 갔을 때 추가 비용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 그리고 택시 기사님에게 외쳤다.


"기사님 여기 앞에 이수역에서 내려주세요"

"군자까지 가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냥 이수역에서 내려주세요"


 이수역 근처에서 지하철 탑승까지 계단을 타다다닥 밟아가며 빠른 속도로 내려갔다. 군자행 막차는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벌리고 있었고 나는 미끄러지듯 몸을 간신히 지하철로 밀어 넣었다. 거친 숨을 고르며 "휴~만 오천 원 아꼈다." 그 순간은 택시의 검은 가죽 시트보다 지하철의 딱딱한 은빛 의자가 얼마나 멋지고 편한지 나 말고는 아마 잘 모를 것이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에는 아주 영악하고 지독한 구두쇠 스크루지 영감이 나온다. 나는 장남 삼아 스크루지를 본떠 스스로를 '스크루지 안'이라 불렀다. 내 소비 철학에 대한 자부심과 당당함을 해학적으로 승화시켰다고 자평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냥 내 모습이 쪽팔렸다. 나도 남들 앞에서 한 턱 크게 내고 싶기도 했고, 아내에게 원하는 것들 마음껏 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머리로는 되는데 마음으로는 잘 되지 않았다. "나는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된 걸까?"


  우리 집이 찢어지게 가난한 것도, 부모님 사업이 망해 길바닥에 나 앉은 것도 아니었다. 물론 부자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어려웠던 기억도 없었다. "그런데 무엇이 날, 돈 앞에 서면 이렇게 작아지게 만들었을까?" 하루는 이 문제를 놓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지난 온 나날을 더듬어 보면서 돈에 얽힌 순간순간들을 복기해 봤다. 순간 과거 뜨거웠던 한 장면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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