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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성길 Sep 17. 2020

둘. 스크루지는 고추농하를 지었다.

나에게 5월 5일 '어린이 날'은 엄마, 아빠 손잡고 놀러 가는 날이 아닌 고춧모를 이식(고추 씨앗의 싹을 틔우고 적당히 자란 고추모를 밭에 옮겨 심는 작업)하는 날이었고 8월 15일 '광복절'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이 아닌 뜨거운 태양 아래 고추와 전쟁을 치르는 날이었다.   


 새벽 5시 어슴프레 해가 떠오르면 엄마는 아직 잠에 취해있는 형과 나를 깨웠다. 비몽사몽으로 밥을 물처럼 마시고 고추밭으로 향했다. 8월의 뜨거운 땡볕 아래 푸릇푸릇한 고춧잎, 그 사이사이에 붉은 고추가 주렁주렁 달렸다. 처음에는 가족들과 조잘조잘 대며 고추를 따나 갔지만, 태양이 정수리를 향해 올라오기 시작하면 하나 둘 말을 잃어갔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두 손만 바삐 움직였다. 뜨거운 태양이 내 몸의 기운을 빨대처럼 쪽쪽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몸은 서서히 지쳐갔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 넓은 밭의 고추를 다 따야만 끝이 난다는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진짜 전쟁은 오전이 아닌 오후였다. 점심을 먹고 땅에서 아지랑이가 피기 시작하면 다시 전쟁터로 끌려나갔다.  


"아~ 정말 일하기 싫다"


 '도살장 끌려가는 소' 까지는 아니었지만 당장 어디라도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허허벌판에 도망갈 곳이란 없었다. 한 층 더 따가워진 햇살은 피할 길이 없었고, 울고 싶은 마음은 눈물이 아닌 땀으로 분출되어 눈 앞을 가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작업도 해가 저물면서 반 강제로 종료되었다. 저녁을 먹고 미치도록 쉬고 싶었지만 고추 선별작업이 이어졌다. 진이 빠진 몸으로 저녁 늦게까지 고추를 고르고 나서야 침대에 들어가 죽은 듯이 잘 수 있었다. 다음날 또다시 전쟁 같은 고추 따기와 선별작업을 마치면 드디어 동네 5일장에 나갈 수 있었다. 시장에 나가신 부모님은 대략 30~40 가마 정도의 고추를 팔았던 것 같다. 20년 전 40kg 고추 한 가마의 시세는 5~6만 원 수준. 고추 한 가마의 교환가치는 잘 몰랐지만 그 한 가마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고통이 따르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매년 이어지는 고추 따기는 나에게 이상한 계산법을 체득하게 했다. 사람들은 해외여행에서 물건을 살 때 '5 달러'는 '6천 원'으로 자연스럽게 바꾸어 생각한다. 이와 비슷하게 나는 원화 금액을 고추 가마로 바꾸어 생각하는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7만 원이요"라고 하면 "고추 한 가마+한 바구니 구나" 이 정도면 얼마나 일해야 하고 어느 정도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지 몸의 작은 세포들이 일어나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한 번은 부모님이 '계'모임을 하셨는데 한 집에서 곗돈을 타고 잠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늦은 밤, 사람들은 우리 집에 모여 대책회의를 열었다. 받지 못한 돈이 대략 400만 원, 그 금액은 불 꺼진 내 방까지 흘러 들어와 내 귀에 꽂혔다. 세상 물정 모르던 15살 꼬마의 눈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400만 원이라는 돈이 얼마나 큰지는 잘 몰랐지만 그 돈을 벌기 위해 부모님, 형 그리고 내가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려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너무 억울하고 분해 닭똥 같은 눈물을 부모님 몰래 밤늦게까지 흘렸다.


 이렇게 나는 '돈 벌기의 어려움'을 너무 어린 나이에 알았던 것 같다. 나만의 고추 가마 환전 법은 어느 순간부터 사라졌지만 소비에 대한 인색함은 계속 남았다. 시간이 흘러 돈을 벌고 지금의 아내를 만나면서 돈 씀씀이는 조금 평범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택시보다 딱딱한 지하철 좌석이 훨씬 더 편하게 느껴지는건 어린시절 힘겨웠던 기억에 대한 마지막 예의가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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