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은 많은데 왜 이렇게 볼 게 없어."
리모컨을 이리저리 누르다 우연히 EBS 다큐멘터리를 하나 보게 되었다. 네팔 어느 시골 마을 아이들의 험난한 등굣길을 다룬 영상이었다. 매일 아침 학교를 가기 위해 급류가 흐르는 강을 건너고 큰 트럭들이 쌩쌩 다니는 고속도로를 히치하이킹으로 이동하는 위험천만한 모습들이 담겨 있었다.
"나도 옛날에 저랬는데"
"뭐가?"
"나도 차 잡아서 집에 가고 그랬다고"
"뭐?!"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에 아내가 신기한 듯 되물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나는 학교가 끝나면 히치하이킹으로 집에 왔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땐 그랬다.
#히치하이킹 #하굣길
중학교 1학년. 나는 조금 더 시내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버스로 30~40분. 하지만 버스가 많지 않았다. 하루에 다니는 버스는 고작 7대가 전부였으니까. 2시 30분에서 3시면 학교가 끝났고 속절없이 5시 반까지는 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물론 학원이나, PC방을 갈 수도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마치 연어인 양 본능적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학교가 끝나고 친구들은 학원이나 PC방 혹은 근처 집으로 모두 다 뿔뿔이 흩어졌다. 겨우 남은 동네 친구 Y와 나는 2시간 넘게 빵집 앞에 쪼그려 앉아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곤 했다. 그러다 문득 내가 Y에게 물었다.
"Y야 우리 차 잡아서 갈까?"
"음... 차를 잡아서 가자고?!" "잘못 걸렸다가 새우잡이로 팔려가는 거 아니야?"
"무슨 새우잡이야" "빨리 집에나 가자"
사실 Y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는 작은 포구가 있었고 서해바다를 오가며 새우를 잡아 젓갈로 팔곤 했으니 말이다. 나는 새우잡이로 팔려가는 것보다 이 지루한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이 지루함은 우리를 히치하이킹의 세계로 인도했다.
하굣길 히치하이킹은 비가 오지 않는 이상 계속됐다. 운이 좋은 날에는 우리 동네까지 디렉트로 한 번에, 보통은 2번은 잡아야 도착할 수 있었다. 가끔 일진이 안 좋을 날에는 3번, 아니 1번 잡고 5~6km를 더 걸어서 집에 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나는 차를 탈 때도 "감사합니다" 내릴 때도 "감사합니다"를 힘주어 말했다. 사실 모르는 사람을 태워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만약 내가 운전하고 가다가 모르는 사람이 태워 달라고 한다면 과연 태워줬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솔직히 무섭기도 하고 뭔가 좀 꺼림칙한 게 사실이니까.
'그렇다면 그들은 왜 우리 앞에 차를 세웠을까?'
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동정심을 유발하는 우리의 '외모'. 왜소한 체구와 까만 피부(심지어 내 친구 Y의 별명은 양갱이었다)에서 나오는 측은지심은 운전자들로 하여금 우리를 북한 꽃제비 수준으로 봤을지도 모른다. 둘째 이유는 바로 눈(目)이다.
처음 차를 잡을 때는 부끄럽고 창피해서 땅을 보며 수줍게 손을 올렸다. 하지만 부끄러움도 잠시. 1달 정도 지나니 마음에 한결 여유가 생겼고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운전자의 눈(目)이었다. 내가 손을 들면 운전자의 눈동자는 슬며시 나를 향했다. 그때 그 운전자의 눈을 향해 자연스럽게 '눈 맞춤'을 시도했다. 신기했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그 사람의 마음과 내 마음이 하나로 실로 이어지는 것만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마음속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제발 세워주세요"
내 작은 눈에서 나오는 무언의 언어는 마치 마법과도 같은 힘을 발휘했다. 그냥 휙휙 지나가던 수많은 차들이 내 앞에서 스르륵 멈춰 섰던 것이다. '눈 맞춤'이 나의 마음을 운전자에게 고스란히 전달해 주는 것만 같았다.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가면서 학원에 다녔고 차 잡을 일은 더 이상 없었다. '하굣길 히치하이킹'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짓이긴 했지만 사람의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는 마법 '눈 맞춤'을 알게끔 해주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상대의 마음을 뺏기 위해 '눈 맞춤' 주문을 종종 읊조리곤 했다. 내 주문이 통했을 때 "아싸~ 내 앞에 차가 섰구나!" "감사합니다"를 마음속으로 크게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