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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이 Apr 19. 2024

가난과 출근길의 상관관계


케첩이 남아 있는데 또 샀다.


어차피 이것도 곧 더 비싸질 테니 미리 사두는 게 이득이라는 생각을 한 거다.

사고방식이 짐바브웨인을 닮아간다.


물가는 치솟는데 월급은 지난달보다 좀 줄었다.

요즘엔 아침에 커피를 사가는 대신 500ml 생수통에 카누를 넣어 흔들어 마신다.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탕후루를 사 먹을까 봐 산책마저 좀 줄었다.


형편이 곤궁하면 사는 세상이 쪼그라든다.

동네에서 집으로, 집에서 손바닥 위 스마트폰으로 작아지는 식이다. 살아는 지는데 산다는 기쁨은 희미하다.


며칠 전에는 대뜸 옷을 샀다.

반찬도 줄이는 마당에 옷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쇼핑 과정은 아주 충동적이었다. 난 그저 퇴근길에 지하철에서 버스로 환승을 하려던 게 전부였다. 그런데 마침 버스 도착까진 10분이 넘게 남아있었고, 밖은 적당히 추웠으며, 고개를 들고 걷다가 자라 간판을 봐버린 거다.


자라 매장은 사방이 거울이라 옷을 쓱 걸쳐보고 계산하기까지 바쁠 게 하나도 없었다. 대기업이 돈을 쓰라고 깔아놓은 멍석에서 나는 모래 만난 햄스터처럼 뒹굴었다.

카드를 긁는 데엔 10초도 걸리지 않았지만 난 그 돈을 벌기 위해 하루 반은 더 일해야 한다. 물론 다 지나고 나서야 하는 생각이다.

100원을 주고 산 종이가방을 안고 버스에 올라탄 후 부스럭거리며 짐정리를 했다. 시끄럽더라도 5초 만에 끝내는 게 나은지, 20초에 걸쳐 조심스럽게 하는 게 나은지 생각하다가 20초 동안 온갖 요란을 다 떨었다.


내가 산 옷은 얇은 검은색 패딩인데, 아주 어벙하고 풍덩한 보자기 같다. 엄마가 보셨다면 그 옷 안을 가득 채울 만큼 잔소리를 할 게 분명하다. 제발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으라는 게 엄마의 일관된 주장이다. 엄마는 도대체 왜 모를까. 점심을 와구와구 퍼먹고도 자유롭게 숨을 쉬려면 보자기 옷이 최고란 걸.




이전 출근길 버스정류장 앞에는 스타벅스가 있었다.


출근시간은 8시 40분이었지만 난 8시가 되기도 전에 학교 앞 정류장에 도착했고, 추우면 추워서, 더우면 더우니까, 졸리면 졸려서, 기분이 좋으면 기분이 더 좋으려고 스타벅스에 들렀다. 아침마다 두유라떼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번갈아 마시면 왠지 성공한 현대인이 된 것 같았다. 그 실체도 없는 감각이 좋아 슬슬 매장에 주저앉아 브런치를 먹기 시작했다. 가난의 서막이 열린 곳은 그곳이었다.


해가 마음대로 지구를 얼렸다 끓이는 동안 지하철과 버스는 최선을 다해 '살만한 환경'을 만들어준다. 아주 고맙지만, 내리자마자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점에서 부작용도 상당하다. 항온동물이라면 항온행성에서 살아야 마땅한 게 아닌가. 아니면 적어도 항온국가에라도. 나는 쇠붙이가 아니라서 아무리 담금질을 당해도 단단해지지 않는다. 단군할아버지의 <자손 강하게 키우기 대작전>은 실패했다.


나는 추위도, 더위도 많이 타는 관계로(나를 수년간 관찰한 친구는 '너는 그냥 참을성이 없다'라고 결론 내렸다) 천국 같은 대중교통에서 쫓겨나자마자 냉난방기의 축복을 받은 공간으로 대피한다. 그 대피소가 과거엔 스타벅스, 지금은 자라인 셈이다.


샤넬이나 에르메스가 있었으면 들어갈 생각조차 안 했을 텐데, 하필 스타벅스나 자라인 게 문제다. 가난은 하지만 먹고 살 수는 있는 내게 최악의 입점매장이다. 내 출퇴근길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곳의 임대료에는 프리미엄이 붙어 마땅하다.


그러나 나는 내 월급의 얼마를 주기적으로 가져가버릴지라도 정류장 앞 자라와 스타벅스를 미워하지 않는다. 덕분에 사는 게 좀 재밌어지니까. 이젠 너무 피곤할 때나 한 잔씩 사 먹게 된 커피는 매일 사 마실 때보다 왠지 좀 더 고소하고, 간만에 새로 산 패딩은 또 얼마나 맘에 드는지 모른다.


새 보자기패딩을 처음 입은 데다 아이스아메리카노까지 사들고 출근한 오늘, 나는 또다시 똥꼬 찢어지게 가난해졌음을 직감한다.

그러나 기분도 동시에 째졌으니 그걸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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