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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이 Oct 26. 2023

교사가 받는 선물 클라-쓰

교실 뒤엔 광활한 초록색의 게시판이 있다. 돌이켜 보면 그 당시 내 책상도 초록색이었고, 자꾸 black board라고 우기는 칠판도 사실은 초록색이다. 초록색이 눈의 피로를 덜어준다고 하니, 그건 TV를 코 앞에서 보던 내 시력도 잡아끌어올려줄 영검한 색깔이다. 


그러나 그건 인테리어를 하려는 입장에선 좀 난감한 색깔이다. 어쩜 교실 게시판의 초록색은 바래지도 않을까. 갈매색 정도만 되었어도 북유럽 모-던 인테리어에 도전이라도 해 볼 텐데. 그러나 교실 유리창이 볕을 차단하는 능력이 보통이 아닌 건지, 초록 게시판의 원료가 선크림이라도 되는 건지, 깨끗한 여름을 닮은 그 초록색은 몇 년이 지나도록 그대로이므로 나는 초등학생의 감성에 딱 맞는 명랑 인테리어를 할 수밖에 없다.


내가 교실 게시판을 인테리어 업자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건 중3 즈음부터다. 누군가 날 반장후보로 추천하는 바람에, 나는 그해 반장선거에서 강제로 후보가 되었다. 

“선생님, 저 반장선거 나가기 싫은데요...” 

그러나 선생님은 내 말을 가뿐히 무시하셨으므로 나는 팔자에도 없는 반장 소견 발표까지 하게 됐다. 난 쭈뼛쭈뼛 앞으로 나가서, “안녕하세요. 저는 반장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뭐 이런 식의 짧은 인사말을 하고 자리에 들어와 앉았다. 반장선거에선 당연히 떨어졌고, 난 괜히 망신을 당한 것 같아 좀 분해하며 앉아 있었는데, 담임선생님은 열이 식지도 않은 날 미화부장 자리에 앉히셨다. 내 팔자에 ‘장’이라곤 간장 고추장 된장밖에 없었으니 그마저도 날벼락이었다.


내 뚱한 표정을 눈치채셨는지, 선생님은 내가 비빌 언덕을 마련해 주셨다. 다른 부서와 달리 미화부원은 적성을 고려하여 배치된 거다. 미술 학원에 다니고, 미대 진학을 꿈꾸고, 그림을 좀 그린다 하는 친구들이 모두 미화부에 모였다. 그리고 우리에겐 뒷게시판을 꾸미라는 특명이 내려졌다. 그중에서도 규민이의 미적 감각은 아주 뛰어났으므로, 우린 그 애의 지휘 하에 그 답 없는 초록색 게시판을 꾸미기 시작했다. 새까만 우드락 판을 몇 개 준비해서, 판마다 주제를 잡고 꾸미는 걸로 의견을 모았다. 


그건 아주 신나는 일이었다. 우린 창밖이 어두워질 때까지 게시판을 꾸미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교 후엔 동네 도매문구점을 드나들었다. 잠깐씩 교실에 들르는 담임 선생님은 우리에게 자장면을 사 주셨다. 미술을 잘하는 부원들의 맹활약으로 우린 정말 끝내주게 멋진 뒷게시판을 완성해 냈다. 반 아이들부터 다른 반 선생님들까지 모두가 엄지를 치켜세웠고, 난 틈만 나면 그 게시판을 구경하러 교실 뒤를 어슬렁거렸다. 그건 내가 살면서 이뤄낸 예술 관련 업적 중 가장 위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젠 함께 아이디어를 낼 규민이와 친구들도 없이, 교실 게시판은 오롯이 내 몫이 되었다. 교대에 다니던 시절 미술만은 꿋꿋하게 C+를 받던 솜씨로. 그러나 다행히, 타고난 손방인 나와 달리 교직엔 능력자가 많다. 측은지심마저 갖춘 선생님들은 저마다 시대와 계절과 감성까지 고려한 게시판 자료들을 만들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업로드해 주신다. 내가 할 일이라곤 그중 마음에 드는 걸 뽑아 조합하는 게 전부다. 역시 죽으란 법은 없다. 


첫 담임을 맡게 되었을 때, 난 한참 전부터 앞게시판에 붙일 안내판 양식과 학급 슬로건을 그리고 오리고 붙이며 난리를 피웠다. 그 모습을 보신 교감선생님께선, “지금 그거 할 때가 아니야. 교육과정 짜야지...”하며 날 안타깝게 바라보셨다. 그러나 그때 정성스럽게 만들었던 앞게시판 세트는 그 후로 내리 7년간 온 교실을 오가며 맹활약했으니 그때 그 가위질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 


교실마다 청소 상태가 다른 것처럼, 게시판의 상태도 다르다. 어떤 선생님은 번호순으로 정렬된 작품꽂이에 작품을 수시로 덧대어 끼우며 학습 결과물 전시장으로 톡톡히 활용하시는 반면, 어떤 선생님들은 게시판 꾸미기에 큰 의미를 두지 않으시고 한 가지 작품을 쭉 게시해놓으시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철마다 날을 잡아 영혼을 갈아 넣어 게시판을 꾸민다. 봄엔 꽃, 여름엔 고래, 겨울엔 벽난로와 눈송이가 기본 컨셉이다. 다행히 첫 담임을 할 때 대부분의 틀을 잡아두어 이제 노동력을 별로 투입하지 않아도 그럴듯한 게시판이 완성된다. 이건 비밀인데, 사실 뒷게시판을 그렇게 예쁘게 꾸미고 나면 가장 눈호강을 하는 사람은 나다. 교탁 앞에 설 때마다 시야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러니 게시판 꾸미기에 심력을 쏟는 건 내가 챙기는 나의 복지인 셈이다. 


그 해 봄엔 처음으로 벚꽃 게시판을 컨셉으로 정했다. 교사 커뮤니티에서 벚꽃송이를 만드는 법을 찾아낸 덕이었다. 아침 자습시간과 쉬는시간에 할 일이 없다고 주장하는 몇몇 아이들의 손을 빌려 크기별로 벚꽃송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영어 수업을 들으러 간 사이, 난 혼자 그걸 열심히 붙였다. 3교시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고, 곧 아이들이 교실로 돌아왔다. 몇몇 아이들은 뒷게시판에서 혼자 용을 쓰고 있는 날 발견하고 다가왔다.


 “우와! 선생님, 이거 뭐예요? 벚꽃이에요?”


예은이가 내 곁에 바짝 다가와 물었다. 


 “응. 어제 친구들이랑 만들던 거. 예쁘지?” 

 “네! 선생님 벚꽃 좋아하세요?”

 “그럼~ 좋아하지. 예은이도 좋아해?”

 “음... 네!”


예은이는 왜인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명쾌하게 대답했다. 


게시판은 곧 만개한 벚꽃송이로 가득 찼다. 벚꽃 사이사이에 아이들의 미술 작품이 자리했다. 교실 앞에 서서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장범준의 목소리가 웅웅 울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로 벚꽃이 폈다. 4월이었다. 생각해 보면 벚꽃을 제대로 즐긴 적이 거의 없었다. 어렸을 땐 벚꽃이 예쁜 줄 몰랐고, 대학생 땐 늘 시험기간이었다. 겨우 발령이 나고 나선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 대학원에 다니느라, 하여튼 갖가지 핑계로 그랬다. 


그 해도 별 다를 게 없었다. 폭풍 같은 3월을 겨우 지나 보내고, 이제 학부모 상담주간과 공개수업으로 바쁜 4월이 된 거다. 3월엔 내 품 안에서 얌전히 헤엄치던 아이들이 4월이 되면서 개구리처럼 튀기 시작했다. 그날도 신나 있는 아이들을 정돈시키며 온종일 진을 빼다가, 아이들을 보내고 나니 회의까지 두 시간 남짓의 시간만 남았다. 그 안에 자질구레한 행정업무와 다음 날 수업준비를 모두 마쳐야만 제시간에 퇴근을 할 수 있을 거였다. 창밖에 흩날리는 것들을 깨달을 틈도 없이 교탁 앞에 앉아 지도서를 뒤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노크를 했다. 


 “선생님!”


집으로 돌아간 줄 알았던 예은이와 소민이였다. 몸통보다 큰 가방을 메고서 문을 열어젖힌 두 아이의 볼은 상기되어 있었다.


 “어? 뭐 두고 갔어?”

 “헤헤, 아니요.” 


예은이와 소민이는 방긋이 웃으며 나에게 다가오더니 불쑥 뭔가를 내밀었다. 물이 반쯤 차 있는 500ml짜리 플라스틱 생수통이었다.


 "선생님! 선물이에요!"


예은이가 건넨 생수병 속에는 분홍색 꽃송이가 동동 떠 있었다. 꽃송이를 하나하나 물통에 넣어 온 거다. 세상에, 예뻐라.

그러나 나는 그걸 보자마자 멋없는 질문부터 해버렸다.


 "어, 이거 꽃 꺾은 거야?"


아차, 고맙단 말부터 해야 했는데. 그러나 변명을 하자면 그건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직업병이었다. 꽃송이가 너무 온전하고 예뻤던 거다. 곧바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꽃을 꺾었다는 대답을 듣는 즉시 교사로서 그 애에게 전할 가르침 스물여섯 마디가 곧장 떠올랐다. 여차하면 날숨 한 번에 그걸 몽땅 내뱉을 수도 있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 애의 통통한 볼을 밀어 올리고 있던 입꼬리가 툭, 떨어졌다.  


 "아뇨, 요기 학교 앞에서 주웠어요. 통째로 떨어져 있어서..."


예은이는 애써 준비한 선물에 내가 냅다 취조부터 하는 걸 보고 말끝을 흐렸다. 


 "아, 그랬어? 꽃송이가 너무 크고 예뻐서, 혹시나 했어. 세상에! 이거 선생님 주려고 다시 4층까지 올라온 거야?"


 난 그제야 헐레벌떡 감동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일부러 예쁜 꽃만 골랐어요. 히히"


 소민이가 옆에서 신나게 거들었다. 


길거리에 떨어진 꽃송이를 보고 떠올린 게 나였다니, 난 그 애들이 쭈그려 앉아 정성 들여 골랐다는 꽃송이의 면면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우와, 감동이다! 올해 봄꽃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예은이랑 소민이 덕분에 꽃구경하네!”


예은이와 소민이는 다시 헤헤하고 웃었고, 별 다른 말도 없이, “선생님, 그럼 저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하며 바쁘게 교실을 나갔다.


예은이와 소민이를 보내고, 난 의자를 뒤로 쭉 젖히고 그 생수병을 한참 쳐다봤다. 흩날리는 봄꽃을 맞아본 적은 있으나 꽃술이 몇 개나 달렸는지, 꽃잎은 어떻게 생겼는지 그렇게 열심히 관찰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벚꽃인지 매화인지 살구꽃인지 구분해 보려고 용을 썼는데 정답은 아직 모르겠다. 물멍도 불멍도 아닌 꽃멍을 즐기느라 좀 게으름을 피운 죄로, 그날 난 제시간에 퇴근하지 못했다. 


아무렇지 않았다. 

그건 봄값이었다. 

누군가 날 위해 송이씩 주워다 준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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