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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민 Oct 19. 2017

수화기를 들면, 나의 이야기가 너에게 닿기를

[작지만 멋진 일을 만나다] ② 글소리 부스

경복궁역 2번 출구를 나와 조금 걷다 보면 노란색 공중전화 부스가 보인다. 공중전화기도 그대로 있지만, 여느 공중전화와는 어딘가 다르다. 노란색으로 칠해진 부스 외관에, 내부는 더 심상치 않다. 한 평도 안 되는 좁은 공간 안에는 노란 조명이 켜져 있고, 책상에는 원고지와 노트, 필기구로 어지럽게 채워진 모습이 꼭 누군가의 서재를 옮겨놓은 것 같다. 종이와 펜이 있으니 실제로 이 공간에서는 누구나 글을 쓸 수도 있다. 문을 닫으면 주변 소음이 차단돼 녹음실이 된다. 


사실 이 공중전화 부스는 길거리에서도 사람들이 시각장애인을 위한 낭독 봉사를 보다 쉽게 할 수 있게 만든 공간. 작가 김민관 님과 디자이너 손지성 님의 손을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쓰이지 않던 공중전화 부스를 너와 나를 연결해주는 과 ‘목소리’를 담는 공간으로 개조하는 프로젝트, ‘글소리 부스’다.




‘글소리 부스’ 기획자 김민관, 손지성 님


#01. ‘글’이 ‘소리’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심상치 않은 부스를 만드신 두 분은 누구신가요?

민관) 저희는 글을 쓰는 독립작가들의 모임 ‘라이터스’에서 만난 친구들이에요. 2013년부터 시작된 글쓰기 모임인데, 제가 혼자 글을 쓰다가 저와 같은 친구들과 함께 글을 써보고 싶어서 만든 모임이죠.

지성) 민관 님이 만든 라이터스에서 글도 쓰고 소소하게 디자인도 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쓴 글을 모아서 지금까지 열네 권의 잡지를 냈는데, 그 책들을 디자인하기도 했어요.


글소리 부스라는 건 어쩌다 만들게 된 건가요?

민관) 사실 제가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거든요. 이제 5년 차예요. 전화가 필요할 때마다 공중전화를 찾았죠. 사실 공중전화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언제 끊어질지도 알 수 없어요. 그러다 보니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이 공중전화 부스라는 공간이 얼마나 소중한 지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하지만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손에 전화기를 들고 다니기 때문에 이 공간에 대한 소중함이 잊혀가죠.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쓰이지 않는 공중전화 부스를 뭔가 재밌게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게 됐어요.

지성) 작년에 미트쉐어의 지원을 받아서 저희 잡지를 점자책으로 만들었었거든요. 그 점자책을 국립 서울맹학교에 기증하게 됐는데, 그때 시각장애인 분들을 직접 만나보니 사실 그분들은 점자책보다는 오디오북을 선호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점자를 배우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희는 이제 글을 소리로 녹음해 전할 수 있는 공간을 생각하기 시작한 거죠.


작년 미트쉐어 지원을 받아 제작한 점자책. ©김민관


#02. ‘공중전화 부스’가 ‘글소리 부스’가 되기까지


글소리 부스가 처음에는 이런 형태가 아니었다고 들었어요.

민관) 사실 저희가 처음에 상상한 건 이동식 부스였어요. 이동이 어려운 시각장애인 분들에게 제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게 제작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라이터스 멤버들과 회의를 하다가 “어차피 공중전화 부스라는 게 전국에 다 있는 건데 굳이 끌고 다닐 필요가 있을까”라는 말이 나왔죠. 그러면서 지금의 모습처럼 사용하지 않는 부스들을 낭독 부스로 개조하는 형태를 생각하게 된 거죠.

지성) 슬러퍼 신고 집 앞에 들르듯이 편하게 갈 수 있는 공간을 생각하게 됐어요. 그만큼 가까이에 이런 공간이 있다면 많은 분들이 쉽게 봉사를 하러 오실 수도 있고, 시각장애인들 분들도 가까이 접하실 수 있을 것 같았죠.


그 첫 번째 부스가 경복궁역에 생긴 거네요. 왜 경복궁인가요?

민관) 공중전화 부스를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전국 공중전화부스를 관리하는 KT 링커스라는 회사에 연락을 했죠. 여러 차례 회의 끝에 지금의 자리의 부스를 활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어요.

지성) 사실 이곳 근처에 국립 서울맹학교가 있거든요. 실제로 부스 앞 카페에 앉아있으면 시각장애인 분들이 이 길을 많이 지나다니시는 걸 봐요. 잘 맞아떨어졌죠.


글소리 부스가 지금의 형태가 갖춰지기까지는 두 사람만의 힘으로는 힘들었을 것 같아요. 주변의 도움도 받으셨나요?

민관) 도움의 시작은 한 사회공헌 펀딩 플랫폼에 선정된 거였죠. 저의 머릿속에만 있는 기획을 보고 많은 분들이 후원을 해주셨어요.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큰 힘이 됐죠. 그런데 막상 상상하던 일을 실행하려고 보니 막막하더라고요. 사실 저는 글 쓰는 사람이지 이런 설치 디자인 같은 건 전혀 아는 바가 없었거든요. 제 생각을 현실로 실현해줄 분들의 도움이 절실했죠. 그때 첫 번째 도움을 준 분이 ‘태환’이라는 분이에요. 디자인과 그림을 그리시는 태환 님이 저희 부스의 외관을 완성해주셨죠. 사실 저는 처음에 부스 색깔을 흰색으로 하려고 했어요. 시각장애인 분들의 흰색 지팡이에서 착안했던 거지요. 그런데 태환님이 시각장애인연합회에 문의를 해보시더니 시각장애인 중 저시력자에게는 노란색일 경우 조금이라도 보일 수 있다는 얘길 들은 거죠.

지성) 그래서 부스를 노란색으로 칠하게 됐고, 부스에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했어요. ‘우리는 책을 읽을 권리가 있다’라는 문장인데, 한밤중에 길 중앙에서 프로젝터로 부스에 빔을 쏴서 그 그림자를 따라 한 자 한 자 칠한 거예요. 태환 님이 많이 고생해주셨죠.

민관) 내부 디자인은 블리커 팀의 허주현 님이 도와주셨어요. 저희 수중에 남은 돈이 별로 없었지만 그 안에서 최대한 많은 것들을 할 수 있게 설계를 도와주셨죠. 덕분에 타공판과 의자, 선반 등을 완성할 수 있었어요.

지성) 모든 일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걸 절실하게 깨달았죠. 특히 누군가에게 뭔가를 전달하고 싶은 일이라면 더욱 그렇죠.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관심이 필요해요.

한밤중에 부스에 프로젝터로 글씨를 쏴서 타이포그래피 작업 중인 모습 © 김민관


#03. 글이 소리가 되어 전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들


어느 정도 모습이 갖춰진 뒤에 미트쉐어 프로젝트에 선정이 되었잖아요. 그 후에는 어떤 일들을 했나요?

민관)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은 그냥 전화 부스에 책상만 갖다 놓은 모습이었어요. 무엇보다 내부에서 낭독을 하려면 가장 중요한 게 방음이 돼야 했거든요. 미트쉐어 프로젝트에 선정된 덕분에 흡음재도 사서 붙이고, 문도 설치하게 됐죠. 그랬더니 확실히 소음이 줄어들었어요. 녹음하기에 적절한 환경이 된 거죠.

지성) 문을 달고 나서 크게 달라진 게 또 있어요. 그 전보다 사람들의 관심이 더 커졌다는 거예요. 그 전에는 아예 열려있으니까 의자에 앉아 봤다가도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의식되어서 인지 글을 쓰려다가도 그냥 사진만 찍고 나가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근데 문이 있으니까, 투명한 문이긴 해도 잠시 자신 만의 공간이 생긴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전보다 오래 머무르는 것 같아요. 큰 효과죠.


그러면 지금 글소리 부스에서는 어떤 것들을 할 수 있나요?

민관) 일단 글을 쓸 수 있죠. 비치된 종이와 펜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벽에 설치된 타공판에 걸어두면 되죠. 쌓인 글들은 선정해서 ‘희희랑독’이라는 오디오북 제작팀에 보내주고 있어요. 전문적으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오디오북 낭독 봉사를 하시는 분들인데, 이분들도 미트쉐어를 통해 알게 됐죠. 또, 방음이 되니까 저희 부스에서 녹음도 가능해요. 문을 닫고 자신의 휴대폰으로 글을 소리 내서 읽은 뒤 녹음해서 제 메일(minmin86@naver.com)로 보내주면 돼요. 나중에 이 파일들도 아카이브 할 수 있는 사이트를 만들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형태로요.

지성) 이곳을 찾아주시는 분들에게 동기부여도 되고 재미가 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하다가 약간의 프로젝트 속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어요. 저는 ‘캘리그래피’ 프로젝트를 하고 있어요. 글을 쓰고 거기에 ‘땀쟁이 도움’이라고 표시해두시면, 제가 와서 그 글을 캘리그래피로 다시 써서 꽂아 놓는 거죠. 그걸 사진 찍어서 SNS에 올리고는 있지만 거의 모든 글들이 익명이기 때문에 이것이 글쓴이에게 다시 전달됐는지는 알 수 없죠. 민관 님은 ‘한 페이지 소설’ 프로젝트를 하고 있어요. 시민들이 육하원칙에 따라 글을 적어 우체통에 넣어 놓으면 그것을 단서로 한 페이지짜리 단편소설을 써주는 거죠.


지성 님이 시민들의 글을 다시 쓴 캘리그라피.


아직 녹음 오디오 장비는 미완성인가요?

민관) 아직 실험 중이라고 봐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사실 원래 있던 공중전화기를 녹음기와 오디오로 활용하고 싶어서 세운상가에 가져가서 50만 원을 들여서 개조를 했어요. 수화기를 들면 녹음을 할 수 있고 녹음된 내용을 들을 수 있는 거죠. 신기하게도 정말 2분가량 녹음이 되는 전화기로 변신했어요! 근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죠. 다음 사람이 녹음을 하면 앞서 녹음한 사람의 목소리가 덮여버린다는 거예요. 생각대로 뭔가를 만든다는 게 쉽지 않아요.

지성) 일반 녹음기도 놓아봤는데, 분실이나 훼손의 우려도 있고요. 또 작동이 안 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으니 관리상의 문제도 있어요. 그래서 음향 시설을 비치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엄청난 고민이에요. 아직까지는 방음이 되는 부스 안에서 자기 핸드폰으로 녹음을 해서 녹음 파일을 보내주면 우리가 그걸 가공, 공유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어요.

시각장애인을 위한 낭독 봉사는 전문 교육도 받아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 좀 더 전문적인 환경을 갖춰야 하는 건 아닐까요?

민관) 사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낭독 봉사는 6개월 정도 전문 교육을 받고 또 심사도 받아야만 시도할 수 있어요. 일반인들이 쉽게 시도하기 힘들죠. 저희는 그런 전문 봉사가 아니라 누구든 쉽게 할 수 있는 봉사를 생각한 거예요. 목소리가 좋든 나쁘든, 싫든 좋든, 잘하든 못하든, 누군가에게 글을 읽어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과정에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지성) 안 그래도 그 문제로 가장 많은 상의를 하고 있어요. 물론 완성도 있는 것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죠. 콘텐츠라는 게 완전할수록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테니까요. 근데 요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SNS나 독립출판으로 자신만의 개성이 담긴 글을 올리고, 그것들에 호응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잖아요. 이 부스가 그런 역할을 했으면 좋겠어요. 조금 날 것이더라도 이것이 시각장애인과 일반인들을 이어주는 작은 소통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좋은 시작일 것 같아요.


글소리 부스를 정리 중인 지성 님.

글소리 부스에 더 필요한 건 없나요?

민관) 사람들의 관심이 가장 필요하죠. 그리고 글이 필요해요. ‘글’이 나와야 그걸 시각장애인 분들에게 전해줄 ‘소리’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일주일에 약 100건 정도 글이 남겨지는데, 오디오북으로 만들 수 있는 글보단 낙서가 대부분이에요. 그렇지만 특별히 주제를 정해주거나 하진 않아요. 글쓴이의 마음이 더 진실되게 전달되길 바라기 때문이죠.

지성) 아, 종이나 연필도 늘 필요해요!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기도 하고, 사실 그것들을 그냥 가져가는 사람들도 많거든요. 저희가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와서 채워 넣고는 있지만 역부족이죠. 또 지나가다가 비가 올 때 문이 열려 있다면 닫아 주는 손길, 밝을 때 불이 켜져 있다면 꺼주시는 도움이 필요해요.

앞으로 글소리 부스가 어떤 공간이 되길 바라나요?

민관) 글소리 부스는 시민들의 참여로 만들어지는 공간이니까요. 더 많은 사람들이 친구에게 이야기하듯이 본인이 가진 생각, 경험, 바라는 것을 담은 글을 써주고, 읽어줬으면 좋겠어요. 듣는 이와 들려주는 이의 감정을 공유하고, 다름을 이해하고, 서로를 위로하는 공간이 되길 바라요.

지성) ‘글소리 부스 생태계’가 만들어지길 꿈꾸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관심을 갖고 이용한다면 글소리 부스는 언젠가는 저희가 없어도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로 관리가 되는 부스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럴 때가 되면 다른 지역에 글소리 부스 2호도 만들 수 있을 거고, 그 또한 사람들의 손길로 꾸려가게 되고, 그때 또 다른 부스를 만들고… 이렇게 계속해서 늘려가서 전국에 ‘글소리 부스’가 생겨나는 꿈을 꿔요.


라이터스의 '글소리 부스' 프로젝트와 함께 하고 싶다면?

라이터스 페이스북 페이지 www.facebook.com/writers7
라이터스 낭독 페이지 www.writers7.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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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멋진 일을 만나다]는 서울시NPO지원센터의 2017시민공익활동지원사업 ‘미트쉐어’에 선정된 프로젝트 기획자들과의 인터뷰를 연재하는 칼럼입니다. 미트쉐어는 긍정적 사회변화를 만드는 ‘작지만 멋진 일’을 응원하고 지원합니다. meetshare.kr 


인터뷰어 이혜민은 출판사 겸 기획사 ‘900km’의 에디터이자, 대표입니다. 누군가의 작은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우리 삶의 대안적인 방향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긴 결혼행진>을 쓰고 펴냈습니다. facebook.com/90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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