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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민 Oct 17. 2017

사라지는 것을 기억하는 어떤 방법

[작지만 멋진 일을 만나다] ① 개포동 나무산책

서울 강남구의 재건축 예정지인 개포주공아파트. 그곳에는 약 1만여 가구의 사람뿐만 아니라 약 1만 가구의 나무가 있다고 한다. 30년 이상의 세월을 지나온 나무들은 이제 5층 아파트보다 더 높이 자라난 거목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재건축이 되면 이 나무들은 대부분 폐목으로 처리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식 비용이 많이 드는 데다, 새로운 아파트 환경에서는 거목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 확률이 높지 않기 때문이라는데....


개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재건축으로 환경을 훼손하고 나무의 터전을 빼앗는 일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사라질 것들에 대해 기록하고 알리는 일을 시작했다. ‘개포동 나무산책’이다.




개포동 나무산책, 첫 발걸음

“여기 사시는 분들도 있으실 테고, 사셨던 분들도 있으실 테고, 처음 오신 분들도 있으실 텐데요. 오늘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아쉬워하고, 그것을 기억해주고 같이 기록해보자는 의미로, 함께 산책을 하면서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오늘 여러분들이 개포동의 나무 원정대예요. ”



7월의 마지막 토요일, 오후 4시를 조금 넘긴 시간. 약속 장소인 개포주공 1단지 테니스장 옆 공터에는 이미 꽤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개포동 나무산책’ 기획자 이성민 씨, 일일 진행 도우미로 나서 준 조제, 이랑, 예람 씨, 그리고 SNS를 통해 신청하고 찾아온 열세 명의 참가자와 이날 취재차 참석한 필자와 필자의 남편까지. 이렇게 첫 ‘나무 원정대’가 결성되었다.


성민 씨는 개포주공 1단지가 다른 단지 3개를 합친 규모로 꽤 큰 단지라고 설명해줬다. 약 5천 가구가 있고, 개포동의 1만 그루의 나무 중 약 5천 그루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었다.

“같은 개포동에 살았어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도 있을 것이고, 구석구석 숨겨진 나무들을 찾는 재미도 있을 거예요. 여러분의 시선으로 발견된 나무가 있으면 그것들을 글이나 그림, 사진이나 영상, 혹은 소리를 녹음해도 좋고요. 각자의 방식으로 기록해주시길 부탁드릴게요.”

개포동 지도 한 장과, 진행자들이 나눠 준 일회용 카메라 한 대, ‘개포동 나무산책’, ‘개포동 그곳’이라 적힌 노란 깃발을 들고, 우리는 아파트 사이 푸르게 자란 나무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날 첫 산책 코스는 개포주공 1단지 중에서도 신청자들이 직접 가보고 싶다고 적어 낸 곳들. ‘복합상가 쪽(49동) 공원과 놀이터’, ‘10동 주변’, ‘농구대가 있던 곳’, ‘우성아파트 쪽문 길’, ‘83동쪽 쉼터’, ‘개원초 36동 근처’ 같은 정말 동네 사람만 알만한 곳들이었지만, 그래서 더욱 정겨웠다. 사람들은 그날 서로 처음 만난 사이였음에도 개포동이라는 공간과 그곳에서의 기억을 자연스레 주고받았고, 개포동에 살지 않은 우리도 그저 발걸음을 따라 걷는 동안 각자 품고 왔을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다.




저마다의 개포동, 저마다의 여름, 저마다의 나무

저마다의 기억으로 떠올랐을 그곳, 그리고 저마다의 시선과 방법으로 새롭게 기록되었을 그 푸르른 여름의 한가운데, 저마다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여기 유치원 때부터 살았었거든요. 저기 해바라기 있는 집이 저희 집이었고요, 채송화 기르던 화단이 그대로 있네요. 저희 아빠가 키우시던 곳이거든요. 등나무도 있었는데 그건 없어졌네요.”— 지선아 님, 개포동 35년 거주


“아들 셋인데 제일 어린애를 유모차 끌고 와서 살기 시작했었는데, 걔가 작년에 결혼했어요. 저는 개포동이 제2의 고향이에요. 우리 아들들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서울, 강남에 이런 오래된 수목이 있다는 것, 와보지 않으면 몰라요. 이 자연이 사라지는 건 아쉽고 아깝고 그래요. ” — 이용숙, 한정희 님, 개포동 약 30여 년 거주


“예전에 이곳은 길이 없고 좀 더 숲 같았어요. 중학생쯤 되니까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공원처럼 만들었던 것 같아요. 근데 여기가 좀 으슥하니까 사람들이 이쪽으로 잘 지나다니진 않았어요. (…)이 길이 벌레가 많아서 제가 무거워했거든요. 할머니 손을 잡고 빨리 뛰어가던 장면이 떠올라요. 시영아파트 살던 친구랑 중간지점이었던 여기서 만나서 놀던 기억도 나고요.” — 김영은 님, 개포동 23년 거주


“저는 이곳에 살지는 않고, 곧 사라질 아파트들을 사진으로 기록해두고 있거든요. 오늘 개포동은 처음 왔는데, 이곳이 이렇게 오래된 줄 몰랐어요. 여기 아파트들이 연탄 시절부터 있었다고 하니까 되게 놀랐어요. 오래된 아파트를 보러 오면 눈길이 가는 게, 아파트보다 훌쩍 자란 나무들이거든요. 재개발로 이 나무들도 없어진다고 하니까 안타까워요.” — 최종언 님, 서울 아파트 기록자


“개포 1단지에서만 여러 번 이사를 다니며 살았거든요. 저한테는 나무에 대한 기억이 없는 줄 알았는데, 오늘 같이 걷다 보니까 떠오르더라고요. 매미 유충이 허물 벗어 놓은 걸 보니까 어릴 때 봤던 생각도 나고, 어릴 때 키우던 햄스터가 죽어서 묻어 놨던 나무도 생각나고요. ” — 김혁주 님, 개포동 29년 거주


“4단지, 5단지, 6단지에 살았어요. 30년 넘게 개포동 살고 있지만, 1단지는 와볼 일이 없었어요. 또 다른 느낌의 개포동이었어요. (…)가장 아쉬운 건, 제 고향이 없어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저는 제가 살던 동네를 기록해두는 시간이었어요.” —이혜정 님, 개포동 30여 년 거주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도의 시간

‘개포동 나무산책’ 기획자 이성민 님과의 인터뷰

‘개포동 나무산책' 기획자 이성민 씨(가운데), 영상촬영을 맡은 김비오 씨(왼쪽), 진행을 도와준 조제 씨(오른쪽).


오늘 ‘개포동 나무산책’ 첫 회를 진행하셨는데, 어떠셨어요? 계획하신 대로 잘 되신 것 같으세요?

오늘은 정말 가볍게 산책한다는 게 계획이었고요. 여기 오신 분들의 반응이나, 어떤 걸 보시고 어떤 걸 느낄까 그게 제일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다양하고 많은 분들이 오셔서 같이 참여를 해주시고,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와주셔서 그게 제일 좋았어요. 비가 온다고 해서 살짝 걱정했는데, 날씨도 괜찮았고요.


여기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초중고까지 보내셨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개포동에 더 관심을 가지시게 된 건가요?

네, 저는 개포동에서 초중고 유년시절을 보냈었어요. 지금은 떠나왔지만 개포동의 재개발 소식을 듣고, 사라지게 될 나무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사진과 영화로 기록해야겠다 생각하고 처음에 혼자서 작업을 해왔어요. 그걸 ‘개포동 그곳’이라는 이름으로 SNS에 올리면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거기에 댓글 달아주시고 관심이 있는 분들이 많이 얘길 해주시더라고요. 어딜 가면 어떤 나무가 있다고 알려주시기도 하고. 생각보다 비슷한 생각을 가지신 분들이 많구나 싶었어요. 그것 때문에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 것도 큰 것 같아요.


여름의 한가운데를 오늘 함께 걸었어요. 성민 님의 기억 속 그때 개포동의 여름이 생각나셨을 것 같아요.

그때의 여름에는… 아이들이 되게 많았어요. 더워도 밖에 나와 노는 아이들이 많았거든요. 지금의 이 빈 공간들을 보면서 해질 무렵 버글버글한 풍경들이 생각났어요. 땅따먹기도 하고, 요새는 못하는 놀이들을 하고 놀던 곳이라. 뛰어다니던 모습도 생각나고,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해질 녘까지 놀다가 “누구야~ 밥 먹으러 와~”라고 외치는 엄마 목소리도 생각나고. 그런 활기 있던 동네. 나무의 생동감만큼이나 사는 사람들도 활기 있었던 곳이었다는 게 생각나죠.


요즘 재건축 아파트에 대해 관심을 갖고 기록하는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죠. 근데 그중에서도 유독 ‘나무’에 먼저 초점을 맞추게 된 이유가 특별히 있을까요?

이 동네는 점점 조용해지고 한적해지는데, 나무는 점점 성장하잖아요. 저도 나무처럼 같이 성장해서 이제 어른이 되었는데, 제 나이보다 많은 그 나무들은 사라진다고 하니까 뭔가 묘한 공감, 동질감이 들면서 감정이입이 된 것 같아요. 친구들을 떠올리는 것처럼 나무들을 본 것일 수도 있고요. 나무가 있는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은 사람의 정서에도 굉장히 많은 영향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상실의 정서인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이… 사실 나무는 그 정서의 ‘대표’를 띄는 것 같고요. 사라질 나무 자체도 너무 안타깝고, 또 나무와 같이 있는 공간과 거기 있던 사람들, 그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것이 안타깝죠.


이곳 개포동 아파트 단지에만 1만 그루의 나무가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는데, 그것을 재개발하면서 다 없앨 거라는 것도 충격적이었어요. 재개발의 다른 방법도 고민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생각해보면 도시에서 우리가 주거 공간이라고 하는 곳에 나무는 늘 있는 것 같아요. 자연과 인간은 늘 같이 살아왔거든요. 그래서 심지어 새로 지어지는 아파트 같은 경우는 나무를 지방에서 또 가져와요. 사실은 지금 그 자리에 있던 나무들을 보존하고 재건축을 하면 좋을 텐데, 그 생각과 방법이 아직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는 거죠. 근데 그것도 어쨌든 자연과 함께 하고 싶다는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이 있다는 거거든요. 그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런 식으로 재건축이 될 때마다 송두리째 없애버리고 또 만들고 심고 하는 방법들이 과연 좋은 것일까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재개발이 되면 아파트가 없어지고, 사람이 떠난다고만 생각했다가, ‘나무’라는 것에 시선을 두니까 또 어쩌면 잘 보이지 않았던 더 많은 것들이 사라지겠구나라는 생각에 서글퍼졌어요.

맞아요. 생태계만큼 중요한 것이 보이지 않는 것들이에요. 사람의 추억과 같은 뭔가가 깃들어 있는 공간이라는 거죠. 사실 이런 것에 대해 사소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 저는 그게 사소하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공간과 나무 한 그루를 어떻게 이어가고 잘 보존할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재건축을 계획한다는 것이, 굉장히 지나친 생각이지 않을까. 저는 그런 보이지 않지만 소중한 것들을 알리는 작업을 하고 싶은 거고요. 이 안에서 여러 사람들의 의견들이 모아지면 또 같이할 수 있는 것들이 더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해요.


오늘 산책할 때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공동 기록의 도구로 나눠주셨잖아요. 참여자분들이 함께 찍은 사진들이 어떻게 나왔을지 궁금하네요. 이제 그 사진들은 어떻게 되나요?

저도 궁금해요, 과연 어떤 시선이 담겼을지. 이 사진들은 현상해서 #개포동나무산책 이라는 태그로 산책자들이 찍어주신 사진이라고 해서 온라인에 먼저 아카이빙을 할 거고요. 기회가 되면 오프라인에서도 선보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SNS를 통해서 굉장히 빠른 방식으로 소통과 공감을 얻고 있는 반면, 기록하는 방식으로 선택한 ‘산책’과 ‘필름 사진’은 굉장히 느린 방법이에요. 이런 방법을 택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사진을 찍는 과정이 그런 것 같아요. 뭔가를 계속 발견하는 거잖아요. 좋아하는 걸 보게 되고, 또 보게 되고. 그게 바로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거거든요. 필름 카메라를 나눠드린 이유도, 그러면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어요. 지나치게 될 수 있는 것도 다시 보면서, 천천히 기록하기에 아날로그 방법이 어울릴 것 같았죠.


앞으로 ‘개포동 나무산책’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개포동 나무산책’은 한 달에 한 번씩 계속 진행될 거예요. 기회가 되면 숲 해설가를 모셔서 나무에 대해 들어보는 시간도 한번 가져보고 싶어요. 그리고 현재 2,3단지는 재개발이 진행 중이고, 4단지도 12월이면 거주민들의 이주가 시작되죠. 1단지도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1년 미만일 것 같은데, 이곳도 이주 날짜가 정해지면 캠프를 한번 해보고 싶어요. 개포동의 어떤 빈 공간에 모여 좀 더 깊이 이야기 나누면서 배움의 시간, 즐겁게 잘 떠나보내는 시간을 마련해보고 싶어요.


‘개포동 나무산책’을 통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해 너무 당연시 여기며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요. 이미 운명처럼 정해진 재건축을 혼자만의 힘으로 막을 순 없겠지만, 그곳에 담겨있는 시간과 이야기를 함께 기억하고, 마지막을 잘 준비하며 정성껏 배웅할 수 있는 ‘애도의 시간’을 우리 모두 가졌으면 해요. 사실 오늘 나무산책 신청자 분들께 더운 날씨임에도 ‘흰색과 검은색’ 복장을 권해드렸던 이유이기도 해요. 상실 후 애도의 시간을 잘 보낸 뒤 성장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사라진 이후뿐만 아니라, 사라지는 과정 속에서도 사라짐을 그냥 사라지게 두지 않고 기억하고, 기록하고, 알렸으면 해요. 그러면 앞으로 우리의 삶의 방식이나, 재건축의 방향도 조금씩 다르게 성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곧 사라질 개포동의 기록을 함께 하고 싶다면?

카카오스토리페이스북인스타그램에서 '개포동 그곳'을 검색해주세요.
나무 산책자들의 기록은 #개포동나무산책 태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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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멋진 일을 만나다]는 서울시NPO지원센터의 2017시민공익활동지원사업 ‘미트쉐어’에 선정된 프로젝트 기획자들과의 인터뷰를 연재하는 칼럼입니다. 미트쉐어는 긍정적 사회변화를 만드는 ‘작지만 멋진 일’을 응원하고 지원합니다. meetshare.kr  


인터뷰어 이혜민은 출판사 겸 기획사 ‘900km’의 에디터이자, 대표입니다. 누군가의 작은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우리 삶의 대안적인 방향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긴 결혼행진>을 쓰고 펴냈습니다. facebook.com/90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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