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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니쉬 Jul 10. 2023

나의 이야기

어쩌면 우리들 대다수의 이야기

나는 디지털 콘텐츠 중독자였다. 이제는 완전히 디지털 콘텐츠로부터 해방되었느냐 묻는다면, 여전히 분투하고 있다고밖에 답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요즘엔 하루하루를 꽤 만족스럽게 보내고 있다. 이 매거진을 통해 나는 어떤 정의로 스스로를 디지털 콘텐츠 중독자라 판단하게 되었고, 왜 디지털 콘텐츠 중독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으며, 내가 공부한 중독에 빠지는 이유와 해방되기 위한 방법을 나누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나처럼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목차

1. 나의 이야기 - 내가 생각하는 중독의 정의와 과거의 내 모습 (현재글)
2. 엄마인 내가 디지털 콘텐츠로부터 벗어나야 했던 이유
3. 우리가 디지털 콘텐츠 중독에 빠지는 이유
4. 디지털 콘텐츠 중독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방법
5. 에필로그




내가 생각하는 중독의 정의

나는 1990년생으로, 학창 시절동안 컴퓨터와 인터넷 기술이 해가 다르게 변하는 걸 몸소 겪으며 자라왔다. 학교는 교육과정에 컴퓨터 시간을 넣고 학생들에게 이 중요해 보이는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장려했다. 하지만 빠르게 변하는 기술에 뒤쫓듯 적응해 가며 부작용도 나타났다. 인터넷과 게임을 하느라 학교생활에 영향을 받는 아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학교는 부랴부랴 인터넷/게임 중독 사태를 대응하기 위해, 학생들이 이를 자가진단할 수 있도록 자가진단 척도를 나눠주기도 했다. 이 때는 하루에 몇 시간 이상 인터넷/게임을 하는지가 중독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나는 디지털 콘텐츠에 얼마 이상의 시간을 쓰느냐로 중독자이다 아니다를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과도한 양의 기준이 다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프로게이머는 게임을 일반 사람보다 훨씬 많이 하겠지만 그게 업이기 때문에 중독이라 말할 수 없다. 또한 대중문화평론가에겐 TV를 보는 게 일이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TV와 스트리밍 서비스에 쓰는 게 당연할 것이다. 이처럼 어떤 절대적인 시간의 양을 기준으로 중독이냐 아니냐를 무 자르듯 가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중독자의 정의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 원하는 만큼만 하는 절제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 정의를 <갈라디아서>를 읽다가 발견하게 되었다.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5장 16-17절


실제로, 서울아산병원 질환백과의 <인터넷 중독>의 정의에 따르면, "컴퓨터 및 인터넷 사용과 관련하여 자율적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를 가장 먼저 이야기한다.


따라서, 나는 프로게이머나 대중문화 평론가가 아닌 일반인이라도, 자신의 여유와 쉼을 위해 자기가 원하는 만큼만 디지털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소비 시간이 얼마가 되었든 중독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당신이 하루에 몇 시간 이상을 디지털 콘텐츠에 쓴다고 해서 "당신은 중독자입니다"라며, 정죄하고 싶지 않다. 절대로 말이다. 당신의 디지털 콘텐츠 소비 생활에 스스로 만족한다면, 이 글을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스스로 만족하지 않는다면, 당신처럼 스스로 만족스럽게 살지 못했던 내 이야기를 읽어보면서 해방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의 내 모습

나는 몇 달 전까지도 혼자만의 시간이 생겼을 때 내가 원하는 대로 시간을 쓰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후회하던 삶을 살았다. 나는 자기 계발을 위해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거나, 진정한 안식을 위해 낮잠을 자거나 기도를 하거나 음악을 듣는다거나 등의 활동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유로운 시간의 틈이 생겼을 때, 곧바로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조금만 쉬어볼까’하는 생각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디지털 콘텐츠(네이버에 있는 드라마나 예능 클립, 카카오톡 채널의 유머 글, 넷플릭스나 유튜브의 동영상 등)를 보곤 했다. 그러고 나서는 내가 계획한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디지털 콘텐츠에 썼음을 확인하며 후회하곤 했다.


이렇게 디지털 콘텐츠에 중독된 삶은, 돌아보면 중학교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때는 엄마가 김밥집에서 늦게까지 일을 하고 돌아오셨는데, 나는 엄마가 그리워 엄마가 올 때까지 TV를 보면서 깨어있었다. 그래서 매일 밤 졸리기 직전까지 TV를 보다 늦게 잠들게 되었고 거의 매일 학교에 지각을 했었다. 겉으론 매일 지각하는 삶에 대해 내 주관이 뚜렷한 거라며 학교는 독특한 나를 가둘 수 없다고 스스로 합리화했었다. 하지만 깊은 내면의 나는 그렇게 매일 지각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맘에 들어 하진 않았었다. 그때는 중독이라 인지하진 못했지만, 중독 상태였던 것이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는 기숙사 생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콘텐츠 중독이 없었다. 환경적으로 공부와 그리고 함께 지내는 친구들에게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TV 콘텐츠와 멀어진 삶이 내게 무척 만족스럽다는 걸 깨닫게 된 시기였다. 이후 나는 자취방과 신혼집에 TV를 두지 않는 등 TV와 멀어지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하지만 삶에 TV는 없앴어도, TV보다 더한 것이 생기고 말았으니, 그건 스마트폰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수도권에서 자취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지 않으니 수시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디지털 콘텐츠에 많은 시간을 쏟게 되었다. 특히 잠들기 전 디지털 콘텐츠를 보다 잠드는 습관이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이렇게 다시 시작된 콘텐츠 중독에 대해 혼자 자취하면서 그리고 결혼 후 남편과만 살 때까지는, 솔직히 심각성을 느끼진 못했다. 전날 잠을 많이 못자더라도 다음날 좀 피곤한 상태로 살면 되고, 특히 다니던 직장이 좀 자유로운 편이라 출근을 늦게해도 괜찮아서 심각한 문제라 여기지 못했다.


그러다 아이를 낳고 나서 이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아이는 일찍 일어나는데 나는 밤에 늦게 자니 (12시는 기본으로 넘겼고, 심할 때는 2-3시에 잠듦), 도저히 질 좋은 육아를 할 수 없었다. 심지어 밤에 보는 컨텐츠가 내가 정말 보고싶고 원하는 콘텐츠냐, 그것도 아니었다. 뭐 재밌는 거 없나 이리저리 찾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그렇게 시간 들여도 재밌거나 유익한 콘텐츠가 없을 때가 훨씬 많았다. 이렇게 무가치하게 시간을 보내면서 나 하나만 피해보는 게 아니라 아이에게까지 영향을 끼치니 문제가 심각하다 여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약 2년 전부터 중독에 대해 공부를 시작하였다. 공부한 걸 바탕으로 삶에 적용해보고,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도 받으며, 이제야 디지털 콘텐츠 중독으로부터 조금씩 해방되고 있음을 느낀다. 심각성을 인지하고 중독으로부터 어느정도 해방되기까지 2년여의 시간이 걸린 것이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매거진을 통해 그 고민의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


다음 글에서는 엄마인 내가 왜 디지털 콘텐츠 중독에서 벗어나야 했는 지, 오늘 이야기한 내용(육아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과 더불어 내가 정리한 이유들을 나눠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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