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폭력의 씨앗> 리뷰
2017년의 85번째 영화로 <폭력의 씨앗> 봤다. 핸드헬드로 내내 화면이 흔들려서 총격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긴장감이 내내 맴돌던 영화였는데, 긴장감만큼이나 '통제력이 주는 짜릿함, 도취감, 쾌감에 인간이 얼마나 쉽게 취하고 흔들리는가' 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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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 개인이 '통제력에 관한 환상'을 갖게되는 경로는 참 다양하다. 나이, 연차, 계급, 학연, 지연, 더 많은 정보, 더 많은 인력, 더 높은 지위. 이 모든 것은 사람과 사람을 그저 평등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초등학교 2학년 국어 책 여느 단원 제목 '나, 너, 우리'가 다시금 소름돋게 다가오는건 우리와 너희를 구분짓고, 나와 너를 구별하면서 끊임없이 서로를 구분짓고 지위를 획득하려드는 모습이 오버랩 됐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선 여기에 폭력의 내리흐름을 덧붙였단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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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생각보다 사소한 권력으로부터 통제의 쾌감을 맛본다. 허상인줄로만 알았던 것이 현실의 일이 될 때 얻는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 또한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 좀 더 나은 지위를 얻었단 것에 기인해 이전보다 자신감 있게 말을 내뱉는 일, 조심하는 척 배려하는 척하는 선의의 가면을 쓰고 건네는 몹쓸 조언들. 나는 가해자가 아닐거라 생각하며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누군가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고 느낀 순간 나는 그 어떤 말도 더 할 수 없겠단 생각을 했었다. 영화의 모든 대사가 폭력적이라 느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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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최근(약 9개월 전)에 훈련소 생활을 하면서 학부와 대학원을 거쳐 의사 면허를 취득하고 군대체복무로 현재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단 사실이 너무 다행이라 여긴 순간들이 있다. 가령 몸이 아파서 의무실에 왔는데 다시 괜찮아져서 훈련소로 복귀하려는 훈련병을 갈구는 선임을 본다든지.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훈련병을 봤다든지. 다들 힘든데 왜 너만 힘든척 하냐며 왕따를 시킨다던지, 함께 즐기지 않으면 쪼다로 본다든지. 언제부터 그들은 타인에 대한 평가를 그리 쉽게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지 참 궁금한 순간들이 있다. 그럼에도 그 체계 안에선 본인이 가해자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직 피해자만이 존재한다. 그렇담 대체 그 많던 폭력은 누가 다 행했을까. 약자와 피해자는 생각만큼 그렇게 멀리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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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문제인 것은 군대란 폐쇄적 공간에서의 구술법으로 간주되는 '폭언과 폭행'은 열린 세계에서도 통용되는 성문법이란 점일게다. 폭력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타고 이어진다. 상병이 그 아랫사람에게, 일병에게, 이등병에게. 일병이 누나에게, 매형에게, 그리고 다시 그들로부터 내게 돌아온다. 다 그렇게들 산다, 참 끔찍하게. 해서 그런 꼴을 당하지 않으려고, 폭력의 성문법 위에 살아남고자 그렇게들 폭력을 행하며 산다. 그리고 그렇게 모두가 점점 무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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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보면 사람이 사람에 분노하고 폭행하고 죽이는 일이 인간의 본성에 해당되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비극적인 결론일지언정 그것이 사실임을 부정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본능이 아니고서야 이런 사건사고가 이리도 빈번하게 일어나는걸 설명할 수 있는 이론같은게 있기나 한지 모르겠다. 지난 5월에 했던 이 생각을 아직 그 무엇도 해소해주지 못했다. 그 와중에 이 영화를 만났으나 <폭력의 씨앗>은 유별난 타인에게 있는게 아닌 '통제력에 대한 환상'을 가진 우리 모두에게 있는거란 얘길 다시금 확정적으로 듣는 것 같았다. 감독님이 생각했던 원제는 이게 아니었단 인터뷰를 어디선가 본 것 같고 그게 뭐였는진 기억이 나질 않지만 영화 제목이 참 잘 붙여진 것 같다. 오바로크를 살린 포스터 제목 디자인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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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튼, 보는 내내 속으로 욕을 내뱉게 만든 좋은 영화였다. 보고나서 생각나는대로 써서 두서가 없지만 이 정도로 후기를 마무리해본다. 나도 내가 무슨 소릴 쓴건지 모르겠다. 폭력이 싫지만 폭력을 행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약간의 환멸을 느끼는. 그래서 좀 멍해지는 그런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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