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레기의 기레기 된 것은 기레기만의 문제는 아니다.
몇 주간 미디어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는 조국(법무부 장관 임명자) 관련 이슈가 뜨거웠다. 후보자가 가진 능력의 검증은 멀리 제쳐두고 그를 둘러싼 여러 가지 관계와 정황들에 대해서 특정 정당과 여러 언론에서 크고 작은 의혹들을 인스턴트 커피처럼 쏟아내고 있다. 가장 많은 의혹을 제기하는 특정 정당에서는 아마도 미디어를 접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의혹이 있는 사람인데, 장관으로 적합하겠어?'라고 생각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실제로도 (안타깝게도) 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의도에 맞춰서 생각하기도 했고.
많은 논란들은 결국 그가 장관으로 임명이 되면서 일단락되었지만, 이번 일을 둘러싼 논란의 중심에는 기레기가 있다는 것을 한 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언론인의 기본 자질도 없고, 알고 있더라도 지킬 줄 모르는 기레기들이 있는 한 이와 비슷한 일들은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고, 우리는 계속 이들의 싸구려 자극적인 기사에 노출되어서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을 테니까.
사실 기레기에 대한 좌절과 분노, 한탄은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다. 아마도 우리를 가장 분노케 했던 것은 세월호 사고 관련 오보들과 여러 확인되지 않은 자극적인 기사들이었을 것이지만, 우리나라 기자들의 수준 낮은 자질이 드러났던 것은 의외로 다른 곳이었다.
이 동영상은 예전에 오바마 대통령이 2010년 한국에서 있었던 G20 서울 정상회의에서 폐막 연설 직후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을 받겠다고 했지만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던 민망한 상황이다.(결국엔 중국 기자가 질문을 했다)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서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져야 하는 기자들인데, 게다가 G20이라는 국가적 이벤트에 초청될 정도면 나름 엘리트 들일 텐데 그 자리에서 질문하나 던지지 못하는 기자들이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깊이 있는 질문을 할 줄 모르니 수준 있는 기사는 당연히 쓸 줄 모르고 질 낮은 기사들만 양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죽하면 기레기들의 행태를 참다못한 한 레퍼가 기레기에 관한 노래를 만들어서 그들을 비판까지 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기레기들은 늘 우리 사회에 있었지만 예전에는 우리가 기레기를 기레기인 줄 몰랐을 뿐이다. 예전에는 조중동으로 대변되는 주류 언론이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한쪽으로 편향된 시각으로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이슈를 접할 수 있었다. 언론에서 언급되는 뉴스들이 진실(Truth or Fact) 그 자체의 나열 같지만, 사실은 '의도적으로 마사지된' 콘텐츠들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어떤 자동차에 대한 소식이 있다고 하자. 그 자동차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Fact 1: 7년만에 새로 디자인 된 세련된 외관과 인테리어.
Fact 2: 기존 모델보다 연비가 다소 떨어짐.
근데 같은 자동차 뉴스를 미디어 A, B가 어떻게 다르게 전하는지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A사 기사 제목: "7년만에 새로운 모델을 선보인 XX, 연비를 뛰어넘는 북유럽감성 디자인으로 소비자에게 어필"
B사 기사 제목: "이목을 끄는 디자인. 타사 대비 부족한 연비는 아쉬워..."
이렇게 같은 사실을 다루는 것임에도 언론사의 성향 및 논조에 따라 실제 사실이 다르게 전달된다. 그래서 우리처럼 미디어를 소비하는 사람들은 늘 비판적인 사고를 가져야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요즘처럼 범람하는 기레기들이 있으면 그마저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 특정 검색어가 한국 유명 포털사이트 검색순위에서 눈에 띈다.
이번 법무부 장관 임명과 관련하여 '한국 언론 사망', '한국 언론 기자 수준'과 같은 검색어를 띄운 이유는 아마도 기레기들이 수없이 양산해내는 제대로 확인되지도 않은 한쪽으로 치우친 기사들에 대한 지지자들의 분노와 일침이었을 것이다. 이 점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되는데, 예전처럼 조중동으로 대변되는 주류 미디어에 잠식되지 않은 비교적 균형 잡힌 사람들이 기레기들을 대신해서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서 진실을 확인하고 규명하려는 노력을 대신한다는 것이다.
근데 유독 기자라는 직업을 택하는 사람들의 성향이 한쪽 방향으로 치우쳐서 그렇다고 보진 않는다. 그들만이 가진 조직 문화가 특별하다던가, 혹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직업적 신념이 기레기들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문제의식도 없고, 남의 주장에 편승해서 몰려다니는 모습은 기레기들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을 조금만 거슬러 생각해보자. 대학교, 혹은 그 이전인 중/고등학교 시절에 수없이 듣던 수업시간에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손을 들고 질문하기를 주저했었는지. 수업 마칠 즈음에 선생님께서 '질문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혹시나 누군가 질문해서 수업이 늦게 끝날까 봐 서로 눈치 주고 그냥 넘어갔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가. 아니면 누군가 선생님에게 질문을 했는데 그게 얼토당토 말도 안 되는 질문이라며, '뭐야 쟤.. XX..' 이라면서 속으로 험담을 했던 적은 없었는가. 선생님이 질문을 우리에게 던졌는데, 그에 대한 답을 말했다가 틀려서 민망했던 적은 없었던가.
질문이 장려되지 않는 문화, 정답을 추구하는 교육시스템, '가만있어도 중간은 간다'라는 의식으로 대변되는 사회 문화가 만들어낸 괴물이 기레기라고 생각한다. 질문할 줄 모르고, 내가 가진 생각이 정답이 아닐까 봐 두려워하며,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고 의식도 실종된 상태로써 각자의 독특한 생각을 빌드업(build-up)해서 새로운 가치 있는 논의를 만들 줄 모르는 우리가 바로 문제의 시작이며- 그런 우리 중에 누군가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다면 그가 바로 기레기가 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문제 해결 능력'이 중요하다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시도로 교육 콘텐츠가 만들어져 왔다. 더 많은 양의 문제를 풀게 하기도 하고, 더 많은 종류의 문제를 풀어보게도 하면서 다양한 문제 상황에 노출시키는 것이 입시 교육의 큰 틀이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앞으로 더욱 중요한 미래 세대의 자질은 '문제 발견 능력' 혹은 '문제를 인식하는 능력'이라고 생각된다.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앞으로 점점 AI, Machine Learning으로 대변되는 Digital Solution들이 인간의 능력을 앞지르게 될 것이나, 어떤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보느냐에 대한 능력은 앞으로도 인간의 지혜에 많이 의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현상이라도 어떤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달라진다. 문제 해결하는 기계를 만들어버리면 같은 현상을 두고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사람들만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현상은 높은 입시 점수를 받은 사람들에게 더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소위 이들이 '엘리트' 직업 중에 하나인 기자를 선택하게 될 확률이 높다.
교육에 있어서 '경쟁'을 강조했던 것이 오히려 경쟁적이지 못한 사람들을 만들고 있다. 경쟁에서 이겨야 좋은 점수를 받고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회사에 가는 '일직선 코스'의 교육 환경이다 보니, 경쟁에서 이기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거나 탐구할 여유가 중고등, 대학 시절에 충분히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기회가 주어져도 무언가를 창의적으로 시도하고 실험하는 것에 대해 '쫄보'가 되어간다. 특히 경쟁에서 1, 2등 하지 못하는- 늘 중상위, 하위권의 학생들은 경쟁에서 이기기보다는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하고 있기 때문에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꿈도 못꾸는 실정이다.
왜 모두들 같은 방향으로 달리게끔 하는가? 교육에서의 경쟁을 강조하는 까닭에 도리어 획일화된 사람들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획일화된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글로벌 경쟁 시대에서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람들이 기자가 되면, 본인이 새로운 주제를 새롭게 들여다보고 진실을 파헤치기보다는, 다른 언론사들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고 싶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자극적이고 확인되지 않은 기사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내가 6년 전에 뉴욕으로 유학 와서 제일 놀랐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질문'을 바라보는 학생과 교수에 대한 의식과 태도였다. 이들은 오히려 기대보다는 수준이 낮은 질문을 엄청나게 많이 던졌다. 한국이었으면 '야... XX.. 그게 질문이냐...'라는 핀잔을 들었을 법하는 질문들이 대다수였지만, 질문하는 이나 질문을 듣는 학생들이나 교수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근데 그 질문을 성의 있게 받아주는 교수는 그의 전문적 식견을 덧붙여 학생이 원하는 대답과 그와 연관된 지식과 정보를 시간을 들여서 꼼꼼히 설명을 해주었다. 때때로 학생들의 질문에 대답하는데 수업 시간이 모자라기라도 하면 별도의 Office Hour를 만들어서 학생에게 대답을 해주거나,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전반적으로 필요한 내용이라고 판단되면 학생들 전체에게 이메일로 답장을 해주기도 하였다.
결국 수준 높은 질문이 아닌 수준 높은 대답이 학생들의 질문을 지속적으로 이끌어내고 있으며, 나중에는 이런 지식과 정보가 쌓인 학생들이 수준 높은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내가 다녔던 대학원 과정은 성적을 A, B, C로 매기지 않고 단순히 Pass/Fail로 매겼는데도 모두가 그런 높은 지식적 탐구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남과의 경쟁을 부추기지 않았음에도 스스로와 계속 경쟁하며 창의적인 결과물들을 만들어내는 의미 있는 환경을 경험한 시기였다.
위의 우스개 농담이 한국 교육 문화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떤 것을 가르치느냐'의 교육 콘텐츠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문화 안에서 가르치느냐'인 환경적인 요인이 더 중요하다. 당장은 이런 문화 자체를 쉽게 바꾸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요즘처럼 '기레기'의 행태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문제의식이 좀 더 교육적인 부분으로 옮겨가서 건설적인 논의와 다양한 해결책 등으로 이어진다면, 몇 년 후에는 기레기들을 찾아보기 힘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라는 옛 속담이 있다. 근데 우리는 현재 누가 콩을 더 많이 심나, 누가 좋은 콩을 심나, 누가 콩을 빨리 심나, 누가 콩을 빨리 수확하나-를 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우리가 콩도 보고 팥도 보려면, 콩도 심고 팥도 심고, 콩은 콩대로 귀하고 팥은 팥대로의 가치를 인정하는 교육과 문화가 필요하다.
se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