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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hwan Mar 30. 2021

포틀랜드 한 달 살기 - Day 2

비, 맑음, 우박 그리고 흐림


어제 밤늦게 도착했는데도 생각보다 기운이 남아 천천히 풀기로 했던 짐을 한꺼번에  풀어서 그랬는지, 아침부터 피곤함이 밀려왔다. 덕분에 늦잠을 잘만도 한데 일찍부터 잠이  아들 녀석의 요란한 소리에 잠이 들지는 못하고 애써 이불로 얼굴을 덮고 조금이나마  쉬고 싶었다. 아들 녀석은 이미 일찍부터 새로운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시끌시끌하게 구경을 하고 있다.


여기 좋은 거 같아! 여기서 평생 살고 싶다, 아빠



아내보다 아들 녀석이 더 좋아한 것은 좀 의외긴 했지만, 그 얘기를 들으니 한 달 동안 머물 집을 잘 골랐다 싶어서 마음이 놓였다. '뭐가 제일 마음에 들어?'라는 물음에, '백 야드(Back yard). 엄청 엄청 넓어. Ten Thousand 만큼 넓어!' (아들 녀석이 쓰는 최상급의 표현이다)


뒤늦게 잠에서 깬 아내도 다른 곳보다 키친을 천천히 둘러보더니 마음에 드는지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인다. 'ㄷ'자 구조로 설계된 키친인데, 냉장고, 선반, 싱크대, 인덕션 및 오븐으로 이어지는 동선도 여유롭고, 바깥 백 야드가 보이는 싱크대 앞쪽의 큰 창분 덕분에 햇볕이 잘 들고 환기도 잘 된다. 나 또한 키친이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공간이다. 순간 아들 녀석처럼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해보기도 했다.


넓지 않지만 여유롭고 따뜻한  키친



포틀랜드의 겨울은 비가 자주 내린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어제 오는 동안에는 출발했을 때 잠깐 비가 오던 지역만 제외하면 대부분 맑거나 조금 흐린 정도였다. 근데 오늘 일어나 보니 아침부터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에서 몇 개월 동안 듣기 힘들었던 빗소리에 잠을 깨니(사실은 아들 녀석의 소리에 깼으면서) 색다른 기분이었다.


여기 오기 전에 같은 회사를 다니는 동료에게 포틀랜드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인도 사람인 그 친구는 캘리포니아에서 나고 자라서 대학 졸업 후에 우리 회사에 입사를 하면서 자연스레 포틀랜드로 이사를 온 케이스다. 그 친구가 하는 말이-


네가 여기 겨울에 놀러 와서 맘에 들어한다면, 무조건 이사를 와야 할 거야. 왜냐하면 봄, 여름 가을은 정말 완벽하거든!



그만큼 겨울에 비도 자주 오고 날씨가 꽤 변덕스럽다는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부터 내리는 비에 그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집 앞 풍경



점심을 먹고 그릇들을 치울 때 즈음이 되니 비구름들이 걷히고 눈부신 파란 하늘이 나타났다. 불과 30여분 전만 해도 비가 내렸던 곳이라고는 생각이 안될 만큼 '쨍'한 하늘이다. 식사를 마친 뒤에 해가 다시 났으니, 백 야드에 나가서 아들과 같이 잠깐 공놀이를 했다. 설거지를 마친 아내가 신발을 신고 나오자, 같이 산책이나 할까? 하면서 가지고 놀던 공은 잠깐 내려두고 마스크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다이닝 룸에서 창밖 너머로 보이는 백야드. 식사를 마칠때가 되니 하늘이 맑게 개었다.



얼마 뒤에 회의가 잡혀있어서 멀리 나가지는 못하고 집이 위치해있는 블록만 한 바퀴 걷기로 했다. 아들 녀석은 새로운 주변 환경에 신이 났는지, 내 손을 놓고 혼자서 껑충껑충 뛰다가 내리막길에 미끄러져서 넘어지기도 했었다. 길 건너편 집에는 차고(Garage) 문이 열려있었는데 한 백인 아저씨가 차량을 정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리막길로 걸어내려 가는 우리와 잠깐 눈이 마주쳤는데 'Hey, how's going?' 이라며 밝게 인사해주었다. 포틀랜드의 사람들이 꽤 친절하다는 이야기는 어디선가 자주 읽어보았었는데 막상 어젯밤에 도착한 낯선 우리에게 쉽게 인사를 해주는 걸 보니 인간적인 면을 느낄 수 있었다. 별것 아닌 인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는 몇 년이 지나도 오고 가는 이웃들과 간단한 눈인사 이상을 하지 않았던걸 생각해보면 꽤 큰 문화적 차이가 느껴진다.


짧게 동네의 한 블록을 다 돌고 들어오니 갑자기 다시 먹구름이 몰려왔다. 비가 다시 내리려나?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후두두둑!' 하고 지붕을 시끄럽게 때리며 굵은소금 크기만 한 우박이 소나기처럼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한국에 살면서도 몇 번 보지 못했던 우박이었는데, 오랜만에 보니 신기한 기분이 들어서 창가에 서서 밖을 한동안 쳐다보았다. 내 발밑 근처에 아들 녀석이 까치발을 들고 '비가 엄청 세게 내린다!'라고 하면서 서있었다. 아들에게 우박이라는 걸 한번 느껴보게 하고 싶어서 얼른 아이를 품에 안고 집 밖으로 나갔다.


현관 앞 근처. 바닥에 하얗게 뿌려진 우박이 보인다.



일 년 내내 늘 비슷한 온화한 날씨에 비가 잘 내리지 않는 것을 자랑삼는 캘리포니아에서 따분하게 지내다가 오랜만에 변화무쌍한 날씨를 하루에만 여러 장면들을 마주하니, 진짜 여행을 온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지낼 많은 시간들 동안에 이곳저곳 많은 곳들을 놀러 다니겠지만, 다른 것보다 '성깔 있는' 날씨 하나만 가지고도 여기 있는 기간 내내 생명력 있는 기운을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se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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