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저가 되는 것은 내 목표에 없었다.
사실 '매니저 트랙으로 가는 것은 생각 안 해보셨어요?'라는 이야기는 4년 전에 예전 회사(eBay) 입사 전에 리쿠르터에게 처음 들었던 질문이었다. 내가 입사하게 된 직급에서부터 IC와 Manager의 트랙이 나뉘니 내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상관없다고 했다. 아무래도 매니저를 하려면 회사와 관련한 지식도 많아야 하고 팀 내부적인 정보와 어떤 프로세스를 거쳐서 디자인을 발전시켜 나가는지, 제품 개발 프로세스 및 비즈니스의 구조도 깊이 있게 파악해야 하는데 갓 입사하는 나로서는 그런 일들을 빠르게 파악하고 잘 해낼 자신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에는 내 손으로 직접 디자인하는 일에 큰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내 손으로 만들어내는 것들을 통해서 어려운 비즈니스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내고, 시장에 긍정적인 임팩트를 만들어내는 것들을 보는 것에 큰 성취감을 느끼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 고민 없이 IC로써 입사를 하게 되었다. 경력 있는 IC였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주니어 디자이너들의 멘토 역할은 해야 했지만, 팀 전체의 프로젝트를 관리한다거나 팀원들의 커리어를 발전시켜 나가는데 큰 책임은 지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게 회사에 적응해 가고 하나둘씩 내가 디자인한 것들을 통해서 여러 가지 긍정적인 성취들을 이루어갈 무렵- 입사 1년 후 즈음에 우리 팀 Head를 맡고 있던 시니어 디렉터(Senior Director)가 퇴사를 했다. 그는 이미 10년 가까이 같은 회사를 다니면서 꽤 많은 성공을 이루어냈으니 새로운 도전을 위해 이직을 하는 것도 당연해 보였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간 만나기 힘들었던) 유능한 리더를 잃었다는 아쉬운 마음도 꽤 컸다. 아쉬웠던 마음도 잠시, 이후의 일들은 미리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착착 진행되었고, 회사를 떠난 그의 빈자리는 내 직속 매니저가 진급을 하며 채우게 되었다. 그러자 내 매니저가 1:1 미팅 때 내게 이런 말을 건넸다.
"이제 너도 회사와 팀에 어느 정도 적응했고, 업무의 퍼포먼스도 좋으니 네가 직접 디자인하는 것보다 매니저를 해서 네 팀의 퍼포먼스를 이끌어보는 게 어때? 직접 디자인 일을 하면서 여러 가지 성취를 해나가는 것도 좋지만, 좋은 디자이너를 길러내는 것도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어쩌면 지금보다 더 다이내믹하고 재밌게 일할 수도 있어. 내가 보기엔 잘할 수 있을 것 같으니- 한번 생각해 봐."
-라면서 내가 직접 팀의 매니저로 역할을 바꾸는 것을 권했다.
그 제안을 듣고 처음에는 왠지 인정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가, 금세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운 질문을 스스로 던지면서 내가 매니저를 할 수 없는 이유들에 대해서 바쁘게 생각해 내기 시작했다. 크게는 두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첫 번째로는 언어. 영어가 걱정이 되었다. 물론 처음에 미국에 왔을 때와 비교해 보면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되지만, 여전히 민감한 이슈에 관한 깊은 대화는 어렵고 피하고 싶다. 게다가 매니저가 되면 예전보다 회의가 많아지니, 나의 얕은 영어 실력으로 그 많은 회의들에서 다루게 될 많은 이슈들을 충분히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할 것 같다는 걱정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로는 직접 디자인하는 재미와 성취감을 더 이상 맛볼 수 없을 것 같아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일단 매니저 역할을 시작하게 되면 내가 직접 디자인하는 시간보다, 팀원들의 디자인을 리뷰해 주고 그들의 디자인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일에 좀 더 신경 써야 한다. 사실 이 일은 매니저 제안이 오기 전에도 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좀 더 책임감을 갖고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주된 일이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내 손으로 하는 디자인 일의 양은 점점 줄여야 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말씀은 고맙지만, 이러한 이유로 당장의 제안은 사양하겠습니다'라고 매니저에게 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 말을 내 매니저에게 이야기했을 때, 그는 크게 웃으면서 '나도 그랬어'라는 말로 너무 손쉽게 받아쳤다. 그리고 이어서 하는 말이, '네가 디자인 보다 영어를 잘했다면 매니저를 시키려고 안 했을 거야. 네가 영어보다 디자인을 잘하니까 시키는 거라고. 어느 누구도 네 영어실력에 기대를 걸지 않아. 네 디자인 실력에 기대를 거는 거지ㅎㅎ' 라며 농담조 섞인 말로 다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매니저 역할을 일단 시작해 보고 이후에 내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다시 IC로 되돌아가도 좋다는 말까지 했다. 며칠을 고민하고 거절을 했는데, 이미 그의 머릿속에 답은 정해져 있는 모양이었다. 그가 나를 신뢰하는데 내가 왜 나를 신뢰하지 못할까?라는 자책감도 머릿속에 한동안 맴돌았다. 그래서 그를 믿고 한번 해보기로 결심했다. 계속 못할 이유를 며칠간 찾아내는 노력보다, 매니저를 하겠다고 한 뒤에 잘 해낼 방법들을 찾아내는데 시간과 노력을 쓰는 편이 훨씬 생산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매니저의 말처럼 ‘해보고 정 어렵고 안 되겠으면 다시 IC로 돌아가지 뭐’라는 생각으로 그의 반 강제적인 제안을 결국 받아들였다.
위의 말 그대로다. 원래 매니저가 되는 것은 내 커리어 목표에 없었다. 그 당시 내 머릿속에서 이미지화된 매니저란, 내가 한국에서 본 매니저들(과장, 부장급)에 대한 기억이 지배적이었고 그들 대부분은 회사 내의 관료화된 시스템 내에서 직급과 상관없이 이리저리 치이면서 작은 부분 하나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선배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이 결단력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때는 시스템이 그랬다. 차라리 직접 디자인하는 디자이너는 본인 목소리는 크게 낼 수 있었거니와, 하다 못해 직접 작업하는 재미라도 있었다. 그런 기억이 4년 전 당시에 머릿속에 남아있어서 그랬는지 왠지 ‘매니저’라 하면 크리에이티브한 디자인 일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지루하고 고루한 일들만 처리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에, 매니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보면 그때 매니저의 길로 들어서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잠도 못 잘 정도로 바쁘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개인적으로 매니저로서 일을 하면서 이뤄낸 성취감은 실제 디자인을 하고 느끼는 그것과는 또 다른 차원이었다 (뭐가 더 낫다는 말은 아니다). 아직은 내 손으로 직접 디자인하는 재미를 놓지 못해서 하이브리드 역할(Hybrid Role: 매니저와 디자이너의 역할을 동시에 함)을 추구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매니징 하는 일에 몰두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매니저로서 배우고 느꼈던 점들은 다른 글에서 따로 정리해 볼 생각이다)
내 경우에는 매니저가 되기 위해서 무언가를 특별히 준비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으로 빛을 내길 원했다. 그것들이 한국에서부터 오랜 기간 부족하나마 조금씩 쌓여 기대치 않는 기회가 만들어졌고, 내게는 선택할 옵션이 없는 상황까지 오게 된 것. 물론 좋은 매니저가 되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은 사회생활 초반부터 이것저것 준비해 나갈 수도 있겠지만, 나의 경우처럼 그것과는 상관없이 전문분야를 살리다 보면 뜻하지 않게 매니저가 될 수도 있다. 특히 나처럼 외국에서 일하는 분들 중에 매니저 역할을 고민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일단 한번 저질러보고 그 길로 달려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선택 전에 맞는 길과 틀린 길을 찾아내기보다는, 선택한 길을 옳다고 증명해 내는 쪽이 더 빠르니까.
se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