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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rtensia Jul 04. 2022

헤어질 결심 (2022): 다정한 선악의 피안에서

박찬욱 감독이 던지는 질문은 한결같다. “죄지은 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 오대수와 금자씨는 복수했다. 현상현은 구원하려 한 끝에 파멸했다. 숙희와 히데코는 서로를 구원했다. 그럼 해준과 서래는?


산과 물이 만나면 어떻게 되는가. 


해준은 단죄하는 자이며, 법의 집행자이고, 서래를 추격하는 자다. 영화 도입부, 그는 까마득한 절벽 꼭대기에 굳이 기어올라 유품을 챙기면서 기도수의 시신을 내려다본다. 저 높은 곳에서 죽은 자를 내려다보는 눈은 감기지 않는다. 더 또렷이 보기 위해 수시로 인공눈물을 넣는 해준은 말한다. “사망 사건이 일어나면, 56%가 눈을 뜬 채 사망한대요. 난 그들이 마지막에 무얼 봤는지 알고 싶어요.” 산처럼 친절하게, 꿋꿋이 버티며 대낮의 정의를 지키느라 동분서주하는 그가 밤마다 맞닥뜨리는 건 불면증이다.


서래는 단죄당하는 자이며, 살인 용의자이고, 해준에게 추격당하는 자다. 왜 산에 오르지 않았느냐고 묻는 해준에게 그녀는 중국어로 답한다. “인자요산은 지자요수라.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합니다. 나는 산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질지 않으니까요.” 서래의 속내는 빛 없는 심해와 같아 도통 알기 힘들다. 그녀는 맑은 날 철썩이는 파도처럼 부드럽고, 거침없이 밀려드는 밀물처럼 난폭하다. 할머니들을 정성스럽게 돌보는 간병인이자, 어머니를 자기 손으로 죽인 존속살해자다.


해준은 그런 서래에게 초밥을 사준다. 물고기는 서래에게 속한 존재, 물에서 나고 자라 예쁘게 손질된 맛있는 음식이다. 누군가에게 음식을 건네는 일은 사람이 사람에게 베푸는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호의이자, 만남의 시작을 알리는 손짓이다.


산과 물이 만나면 어떻게 되는가. 이를 잘 알려주는 주역의 31번째 괘가 택산함, 산 위에 고인 못물의 상이다. 괘명의 함(咸)은 사람의 손발이 서로 닿아 느끼는 감각이자,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따스함이자, 수증기가 찬바람을 느껴 빗물이 되고 또한 빛이 먼지에 닿아 노을을 낳는 자연의 감응이다. 사람이 지어낸 당위로써 누르려 해도 눌리지 않는 우주적인 기쁨이다. 해준은 서래의 꼿꼿한 몸가짐과 사체를 응시하는 정직한 시선에 이끌리고, 서래는 해준의 품위 있는 친절함과 담배를 참아내는 인내심에 이끌린다. 실로 자연스럽게. 그저 양이 음에, 음에 양이 이끌리듯.


그럼에도 그들은 법과 도덕이 지배하는 인간 세상의 주민이다. 해준과 서래는 여전히 추격자와 피추격자, 형사와 용의자로 서로를 대해야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관계를 이어갈 수 있게 돕는 건 이같은 세간의 신분이다. 해준은 특기인 잠복을 살려 밤새 그녀를 지켜본다. 서래는 해준의 시선을 태연하게 등진 채, 까마귀를 잡아온 고양이에게 중국어로 말을 건다. “뭘 이런 걸 물어오고 그랬어. 물어올 거면 그 형사의 심장이라도 가져다 줄래.”


그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이 잠겨 아무도 찾을 수 없게.


어떤 증거도 발견되지 않은 채 수사는 종결되고, 서래는 혐의를 벗게 된다. 이제 그들은 추격자와 피추격자의 구도를 벗어나 단지 남자와 여자로서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된다. 데이트를 하던 날은 엄청나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둘을 감싼다. 서래가 니베아 립글로스를 해준의 입술에 발라주는 동안, 우산에서 끝도 없이 떨어지는 맑은 물이 그의 어깨를 함빡 적신다. 운우지정, 하늘에서 내리는 여름 비가 땅 위에 솟은 산을 푸르게 가꾸듯.


밤새 타오르는 전구의 필라멘트처럼 불면에 시달리는 해준에게 서래는 잠을 선사한다. 천천히 호흡을 맞추며, 심해를 끝도 없이 유영하는 해파리의 꿈을 담아서. 본디 오행의 물은 그 한계를 알 수 없는 깊고 깊은 검은색이며, 겨울이고, 만물이 정지하는 죽음이다. 잠은 작은 죽음이되, 삶을 위한 휴식이다. 이처럼 서래가 상징하는 물의 본질은 가장 다정한 얼굴로 해준에게 스며든다.


아슬아슬한 평화는 우연한 계기로 깨진다. 서래가 월요일마다 돌보는 할머니의 폰에서 발견된 138층의 기록은 서래의 살인 혐의를 증거하고, 두번째로 정상에 올라선 해준은 정확히 똑같은 숫자 앞에 절망한다. 감기지 않는 눈으로 밝은 빛처럼 세상의 죄를 단속해야만 했던 그가 서래에게 말한다. “나는 자부심을 잃었어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그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이 잠겨 아무도 찾을 수 없게.” 그는 어진 사람답게 사랑한다. 흡사 제 손으로 머리를 자르는 삼손과도 같은 비장함으로, 자기 존재를 배반하면서까지.


붕괴. 같은 모국어를 썼다면 흔하게 새어나갈 낱말이건만, 한국어에 익숙치 못한 서래는 국어사전에서 그 뜻을 톺아보며 그 깊이를 깨닫는다. 산과 같은 남자가 스스로 깨어져 무너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칠흑같은 밤, 오직 서래가 이마에 달아둔 등만이 빛난다. 


그렇게 그들의 관계는 끝이 나는 듯했다. 해준은 이포, 안개 자욱한 도시로 돌아온다. 이포는 무진의 오마쥬이자 비일상적 공간이다. 낮에도 빛이 또렷이 들지 않는 세상의 경계, 어스름한 세계에서 그는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서래에게 자신의 운명을 내어주고 왔기 때문이다. 젊음을 지켜야 한다며 잡도리를 하는 정안의 옆에서 해준은 산처럼 쌓인 석류를 까고 또 깐다. 정안에겐 풍요의 상징이건만, 어쩌면 해준의 눈엔 명계의 잠을 떠올리게 하는 과일일지 모른다.


한때 서래가 흥얼거리던 정훈희의 “안개”를 이제는 해준도 흥얼거리고, 필연을 가장한 우연처럼 둘은 각자의 짝을 대동하고 안개 속에서 만난다. 잠깐의 어색한 순간이 지나가고 그대로 아무일도 없을 것 같던 밤, 정안의 폰에 서래의 남편 번호가 찍히고 해준은 살인 사건으로 뛰어든다. 또다시 서래의 남편을 살해한 범인을 찾아.


희열과 분노와 혼란에 휩싸인 해준이 서래를 쫓아 오른 호미산은 눈으로 가득하다. 계절의 순리로써 외양은 달라지되 여전히 눈의 본질은 물이며, 겨울은 가장 물다운 계절이다. 칠흑같은 밤, 오직 서래가 이마에 달아둔 등만이 빛난다. 모든 걸 알고도 선뜻 절벽 끄트머리로 걸어가 유골을 뿌려 주는 해준을 바라보는, 서래의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엔 둥그런 빛이 달려 있다. 이 순간엔 그녀가 그의 빛이다.


가까이 다가온 서래는 해준을 밀치는 대신 끌어안는다. 둘은 비 오던 그날처럼 서로를 바라보고, 눈부신 빛 앞에 해준은 버릇처럼 끝끝내 눈을 뜨려 한다. 둘의 입맞춤은 전 영화를 통틀어 가장 죄스럽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단죄하는 자 해준은, 해서는 안 될 사랑에 빠져 서래의 죄를 은닉함으로써 똑같이 죄지은 자가 되었다. 마치 “박쥐”의 상현이 해서는 안 될 사랑에 빠져 친구의 아내인 태주를 탐하고 죄지은 자로 전락하듯이. 그러나 서래는 태주가 아니다. 남편이 사랑하는 남자를 해하려 하자 그녀는 나선다. 장기말을 건드려 쓰러뜨리듯 남편의 적을 움직이고, 해준의 오랜 자부심이자 삶의 목적에 불을 지핀 후, 한번 더 그를 그녀 곁으로 끌어다놓는다.


해준이 서래를 고발하지 않은 죄는 오직 서래만 알고 있다. 두번째 살인 사건에서 서래의 남편을 실제로 살해한 자는 또다른 무뢰배다. 법과 도덕이 지배하는 밝은 세상에서 해준은 여전히 빛의 권위를 잃지 않는 최연소 경감이다. 무뢰배만 구속하면 그대로 사건은 모순 없이 종결된다. 사랑하는 여자를 파멸할 일도, 사랑하던 여자에게 파멸당할 일도 없다. 모든 것이 깔끔하다. 표면적으로는 말이다.


선악의 피안에서 나아갈지 물러설지 망설이는 인간의 모습은 가장 아름답다. 


잠들지 못한 채 범인을 쫓는 해준에게 서래의 존재는 슈뢰딩거의 상자나 다름없다. 감춰진 진실을 쫓아 모든 걸 까발리면, 사랑하는 여자를 파멸로 이끄는 동시에 자신 역시 완전한 파멸을 맞게 된다. 드러난 사실을 쫓아 사건을 마무리하면, 모든 건 온전하되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결은 영영 오지 않는다. 아내가 있는 해준에게 서래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은 그를 그답게 놓아두는 동시에 영원히 기억되는 것, 즉 영원히 해결 불가능한 사건으로 남는 것이었다. 참으로 영리한 사랑의 방식이지 않은가. 본디 산보다 물을 즐긴다던 사람답게.


그렇게 서래는 자신이 판 구덩이 속에 들어앉아 모래산을 등지고 바다를 바라본다. 헤어질 결심이다. 거센 밀물이 밀려와 구덩이에 고이고 작은 모래산을 부수어 흐트러뜨린다. 모든 게 애초부터 없었던 듯, 광폭한 파도가 온 사방을 휩쓴다. 한때 메마른 산 위에서 죽은 자를 내려다봤던 해준은 이제 바닷물에 발목까지 잠긴 채 하늘을 올려다본다. 서래가 기록한 자신의 목소리에 그는 문득 깨닫는다.


이번에는 누구도 누구를 구원하지 않았다. 해준과 서래의 길은 잠시 교차했다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파도에 흩어지는 모래처럼. 선악의 피안처럼 뿌옇게 안개가 끼는 도시에서. 회자정리면 거자필반이라 했던가. 그것이 도라 했던가. 표면에서 설득력 있는 인간 드라마가 이어지는 동안 상징과 은유는 잠들지 않는 톱니바퀴처럼 정확히 맞물려 돌아가고, 그 둘이 바느질 자국도 없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기교는 오래된 사자성어를 연상케 한다.


언젠가 찾아올 죽음에 저항하는 인간의 모습이 가장 고귀하다면, 선악의 피안에서 나아갈지 물러설지 망설이는 인간의 모습은 가장 아름답다. 애초에 선도 악도 아니되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존재의 가능성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그 가능성을 부드럽게 끌어안는 감독의 시선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인간미를 느꼈다. 이리저리 죄를 짓고 단죄하는 인간 군상을 빙글빙글 웃으며 바라보던 잔혹한 객관은 어디로 갔나요. 나이가 드셨더니 둥글어지셨군요.



p.s. 여담이지만- 산은 큰 흙, 무토에 해당하고 바다는 큰 물, 임수에 해당한다. 토는 수를 극하며, 둘은 같은 양이라 서로 유정치 못하다. 즉 산은 바다에게 남편이자 바른 짝인 정관이 아니라 나를 누르고 억압하는 자인 편관이 된다. 잠깐 비와 눈, 계수가 화면에 임하는 딱 그 동안만큼만 해준은 서래의 연인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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