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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유히유영 Feb 17. 2023

내가 처음 신은 '농구화'

농구가 내 삶에 들어온 과정(2)

얼마 전, 나는 생일을 맞았다. 생일을 별로 안 챙기는 편인데, 올해는 아내가 농구화를 선물했다. 내가 농구를 다시 시작한 기념으로 선물한 농구화다. 처음으로 언더아머에서 ‘커리 스플래시’를 골랐다. 나이키와 아디다스, 리복을 제외한 브랜드에서 산 첫 운동화였다. 그래도 너무 아름다운 자태에 넋이 나가 사기로 했다. 7년 만에 선물 받은 농구화였지만, 내가 농구에 발을 들인 지 30년을 기념해 내 농구화 역사를 돌아볼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농구를 시작하고, 주로 NBA 경기만 보았다. 어린 시절 AFKN에서 토요일에 경기 중계를 빼놓지 않고 시청했다. 마이클 조던이라는 희대의 스타가 직접 뛰기도 했지만, 레지 밀러나 샤킬 오닐, 앤퍼니 하더웨이, 찰스 바클리 등 뛰어난 선수가 즐비했다. 그들의 플레이를 보면서 난 희열을 느끼곤 했다. 정말 완벽해 보였다. 그래서 그들 플레이를 흉내 내려 노력했다. (그런데 내가 따라 하면 웃음거리가 되곤 했다.)


내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선수는 누구였을까?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 나도 최고의 선수라 여기며 그의 플레이를 많이 보았지만, 아쉽게도 아니다. 당대 최고의 3점 슛 마스터 레지 밀러? NBA에서는 작은 덩치를 보며, 내 스타일은 아니라 여겼다. 나는 샤킬 오닐의 플레이를 보며, 늘 감탄하고 가장 많이 따라 했다. 특히 그의 ‘스핀 무브’를 보면서 흉내 내 보려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센터이면서 패스도 잘했다. 그를 보면 참고할 플레이가 많았다. 


내가 고1이던 1994년, 샤킬 오닐은 주목받는 센터였다. 그는 샤크로 불렸다. 키가 216cm에 몸무게 145kg인 거구였지만 빠른 몸놀림으로 상대방을 압살하는 장면이, 그야말로 상어로 불릴만했다. 샤크가 스핀 무브를 선보이면 누구든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덩치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거기에 수비까지 잘하니, 센터 자원이 넘쳐났던 1990년대 NBA에서도 손에 꼽히는 선수였다. 


내 첫 농구화는 바로 이 물건이었다


우리 동네에서 함께 농구를 하던 팀원들도 나를 OO고 샤크로 불렀다. 내가 샤크 같은 몸놀림을 보였다기보다, 덩치만 보고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고2로 올라가면서 내 키는 183cm 찍었고, 당시 주변에서 보기 어려운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 시절 유명 농구 선수들도 그 정도 덩치였지만, 여기는 어중이떠중이가 모인 동네였다. 내 신체조건이 우월하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했다. 


하여튼 난 샤킬 오닐을 안 그 시점부터 관심을 가졌다. 당연히 선수만 의미하지 않았다. 리복에서 출시한 그의 농구화 ‘샤크’에도 내 이목이 끌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니, 난 눈이 돌아갈 정도로 사랑에 빠졌다고 표현하는 게 옳다. 


뭐가 그리 좋았을까? 우선 디자인이 최고였다. 당시 샤크는 너무 멋있어 보였다. 신발 무게와 그 외의 모든 요소가 다 좋아 보였다. 그래서 기능성도 좋게 느꼈다. 가운데 공기를 넣어주는 펌프가 있었는데 그게 너무 멋있어 보였다. 문제는 당시 농구화는 학생이 신기에는 너무 비싸다는 점이었다. 30년 전에 정품 운동화를 사려면 10만 원 돈은 주어야 했던 것 같다.


1993년이면, 20대에 취업해서 벌 수 있는 돈이 100만 원 정도였다. 그러니 학생이 비싼 운동화를 신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르바이트? 지금은 보편적인 생각인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아르바이트할 일자리가 별로 없었다. 그럼, 다음은? 돈을 훔친다. 아쉽게도 그럴 용기가, 내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별수 없이 동대문 시장에 나온 짝퉁을 사는 걸 선택했다. 당시에는 이상하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짝퉁 천국이었다. 그 당시는 현재 중국 같은 제조업 천국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샤크는 신생팀었던 올라도 매직에서 뛰었다. 당시 NBA 공인구로 스팔딩에서 나온 제품을 사용해다.


처음으로 구입한 농구화를 신고, 가죽 공을 손에 쥐었다. 너무 멋있다고 거울을 보며 생각했다. 농구장을 씹어먹을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난 너무 즐거워하며 농구장으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흙바닥에서는 어떤 신발을 신어도 미끄러졌다. 그래도 난 짝퉁 샤크를 신고 뛰면서 날아갈 기세였다.(실제로는 엉망이었겠지만 말이다.) 신발에 가득 넣은 에어도 발목을 잘 잡아주었다. 발목도 전혀 다칠 것 같지 않았다. 내 기분은 한껏 올라갔다. 


그 뒤로 난 샤크 시리즈를 계속 구매했다. 눌러서 넣는 에어가 무슨 가스를 주입하는 방식이 될 때까지 샀다. 물론 짝퉁이었지만,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어느새 신발장은 내 농구화로 가득 찼다. 학생답게 얌전한 신발을 신으라는 엄마의 잔소리도 소용없었다. 난 농구화를 신고 갔고, 당시 학교에는 슬램덩크 열풍으로 농구화 붐이 일고 있었다. 난 친구들과 새로 나온 농구화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농구를 못할 때도 NBA를 시청했다. 요새 NBA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를 고르라면 주저 없이 ‘니콜라 요키치’라고 외칠 것이다. 농구를 정말 아름답게 하는 뛰는 포인트 센터라고 할까. 그가 뛰는 경기를 보고 반해 버렸다. 농구는 저렇게 해야 한다.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모두 완벽한 감각을 보여준다. 완벽한 선수다. 향후 몇 년 동안 그를 막을 수 있는 선수가 나올 수 있을까. ‘아마, 못 나오지 않을까.’ 그의 경기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신발은 ‘커리’를 구매했다. 아니, 생일 선물로 받았다. 이제는 아무리 선수를 좋아해도 그 신발까지 사는 일은 거의 없다. 어머니가 잔소리하던 그 시절 같은 복장으로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이를 먹는 일은 슬프지만, 지금도 바뀌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 니콜라 요키치 같은 농구 센스를 기르는 것이다. 아직 농구를 하고자 하는 마음은 나이 먹지 않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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