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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n 잡은 루이스 Oct 05. 2021

영화 <시몬>과 가상인간 로지

가상인간, 반짝 트렌드는 아닐까?


새 영화 <선라이즈 선셋>을 촬영 중이던 감독 빅터 타란스키(알 파치노) 앞에서 (누군가에게는 별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불만을 마구 터뜨리는 유명 여배우 니콜라(위노나 라이더)가 함께 작업을 못하겠다며 "언론에는 작품의 해석 차이라고 말하겠다"라고 한 뒤 매정하게 현장을 떠난다. 배우들로 인해 오히려 조종받는다고 생각하는 빅터는 이러한 제작 환경이 너무 고통스럽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영화가 무산되려는 그 찰나 마지막 끈을 잡기 위해 니콜라를 대신할 수 있는 여배우를 찾아보려 고군분투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프로그래밍했다며 빅터에게 여배우 캐스팅을 제안한다. 빅터를 '예술가'로 칭하며 팬심을 드러내는 행크는 죽음을 코 앞에 둔 시한부였다. 그가 죽은 뒤 한참 캐스팅을 고민하던 빅터에게 행크의 유품으로 프로그램 CD-ROM이 날아온다. 헛된 공상이라 생각했던 행크의 마지막 말은 그저 아무것도 아닌 환상이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여배우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나자 바로 작업에 들어간다. 프로그램이 만든 가상의 인물, 시몬(Simone, 레이첼 로버츠)으로 인해 세상이 놀랄만한 대작을 연이어 터뜨리게 되고 시몬은 하루아침에 인기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그토록 바라던 성공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과 함께 했던 시몬은 현실이라는 공간에서 만질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는 존재다. 더구나 시몬의 존재감이 날로 커짐에 따라 감독으로서의 입지는 점차 작아질 뿐이었다. 거짓되고 그릇된 허상에 압도당한 빅터에게는 공허함만 남는다. 

이 영화는 2002년 개봉한 영화로 당시 시몬 역의 레이첼 로버츠는 모델이었고 이 작품으로 데뷔했다. 이후 영화의 메가폰을 잡았던 앤드류 니콜 감독과 실제 부부가 된다. 가상 결혼도 아니고 두 사람 모두 허상도 아닌 진짜 사람이다. 

 

알 파치노와 레이첼 로버츠의 영화 <시몬>  출처 : universodecienciaficcion.blogspot.com




가상이라는 공간은 참으로 광활하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광활하다'는 규모의 개념과 무엇이든 가능하게 만드는 창조의 개념으로 보면 또 다르다. 하지만 상상하는 것 이상을 만날 수도 있다. 위에서 언급한 영화 속 주인공 시몬이라는 여배우의 실체를 아는 유일한 사람은 (행크는 죽고 없으므로) 빅터뿐이다. 시몬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면 그로 인한 파급력을 빅터 자신이 감히 감당할 수 있었을까? 영화 포스터에 그려진 것처럼 빅터 자신보다 거대한 시몬을 우러러보듯 바라본다. 배우에게 조종당하지 않고도 대작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감독으로서의 존재감과 자신감 모두 충만했었으나 어느새 시몬에 의해 짓눌리고 만다. 더구나 세상을 속이는 행위가 한계에 다다르자 깊은 고민에 빠진다. 


오늘날 가상의 인물은 이러한 고민 하나 없이 대중과 만나고 있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언급된 아담(Adam)은 인류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이름을 따서 만들어낸 최초의 사이버 가수가 바로 아담이다. 아담소프트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지만 목소리는 분명 사람이다. 당시 설정상 구체적인 성격도 담아냈고 20살(1977년생)이라는 나이와 더불어 남성, 178cm의 키, 68kg, O형이라는 혈액형까지 부여받은 존재다. 1998년 1집 <세상엔 없는 사랑>으로 데뷔했고 이후 2집까지 음반을 냈지만 첫 등장처럼 큰 성공을 이루진 못했다. 사이버 가수 아담과 더불어 류시아라는 여성 캐릭터 역시 가수로 데뷔한 적이 있다.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진 사이버 가수 이후로 가장 화제가 되었던 존재는 스캐터랩의 '이루다(Luda Lee)'이다. 


논란의 중심이었던 스캐터랩의 이루다.  출처 : luda.ai


블랙핑크를 좋아하고 20살 새내기 대학생이라는 컨셉으로 만들어진 인공지능 챗봇(Chat Bot)이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존재하고 있어 다이렉트 메시지(DM)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기본적인 대화가 충분히 가능할 만큼 자연스러운 단어와 문장을 구사하지만 인공지능(AI)답게 업데이트되지 않거나 빅데이터에 없는 Q&A에서는 충분히 빈틈을 보인다. 종교나 정치 이야기에 대해서는 나름 중립적인 뉘앙스로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혐오와 차별, 사용자들의 성윤리, 스캐터랩의 개인 데이터 활용 문제 등 'AI에 관한 전반적인 윤리문제'라는 거대한 파장을 일으키며 짧게 활동한 뒤 사라지고 말았다. 이루다를 창조한 스캐터랩은 홈페이지에 이루다 논란에 대한 공식 입장문을 올려두고 있다. 


로지 인스타그램.  출처 : instagram.com/rozy.gram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방송을 보다가 CF를 하나 보게 되었는데 그저 개성 있는 여자 모델이 춤을 추는 일반적인 광고라 생각했다. 이미 가상인간 '로지(Rozy)'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음에도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 그 유명하다는 로지가 얘구나?"

가상인간 로지 역시 구체적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성별과 나이, 취미 등은 가상인간들이 탄생하면서 기본적으로 새겨지는 정보가 되었으며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는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필수불가결의 창구로 자리하고 있다. 무려 20년 전에 등장했던 사이버 가수는 말 그대로 사이버 세계 즉 가상공간에 존재하는 캐릭터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메타버스라는 키워드가 보다 현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지금 이 시대의 가상인간 역시 매우 사실적이다. 과거의 조악함이나 어색함을 지워내고 나니 오롯이 사람 같은 느낌이랄까? 가상인간의 외모는 딥 페이크 기술이 쓰였고 MZ세대들을 겨냥해 만들어졌다고 했다. 눈이 크고 슬림하면서 긴 머리를 가진 아름다운 여신의 포스가 아니라 눈은 찢어지고 주근깨가 있는 자신의 모습을 오롯이 드러내려는 당찬 성향까지 담아낸 것이라고 한다. 


자동차 광고에 등장한 로지.  출처 : 쉐보레코리아


로지의 경우 협찬만 무려 100건 이상이라고 했다. 목표로 했던 수익은 이미 초과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키 171cm, 영원히 22살에 머물게 되는 가상인간 로지의 인스타그램은 어느새 팔로워 수 90만 명을 넘어 대표적인 버추얼 인플루언서로 자리매김했다. 

엄청난 화제몰이 중인 로지에 이어 롯데홈쇼핑에는 루시(Lucy)라는 이름의 가상 쇼호스트가 등장하기도 했다. 역시 소셜미디어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버추얼 인플루언서다. 가상의 인물이니 뭘 입혀도 맞춤인 듯 일상적인 의상부터 화려한 드레스, 활동적으로 보이는 레깅스나 오피스 룩까지 다양하게 소화하고 있는 중이다. 루시의 인스타그램은 마치 화보를 넘겨보는 듯 이 시대의 패션 트렌드를 한눈에 볼 수 있을 정도다.  

광고계 러브콜에 이어 넷플릭스까지 넘본다는 싸이더스-X의 로지, 패션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루시, 여기에 LG그룹이 탄생시킨 김래아 등 가상인간의 인기는 어디까지 이어지게 될까? 


루시 인스타그램.  출처 : instagram.com/here.me.lucy


로지나 루시는 그 자체로 유행이고 트렌드가 되고 있다. 어떤 연예기획사에서 오디션을 거쳐 연습생으로 오랜 기간 준비한 아이돌이라면 이제 막 데뷔한 것과 다르지 않다. 마침 메타버스(Metaverse)라는 가상의 세계관이 4차 산업혁명 이후 화제의 키워드가 되고 있는 작금의 시점에 하나둘씩 가상인간들이 탄생하고 있고 광고계와 모델 분야 섭렵은 물론 SNS에서 인플루언서로서 활약하고 있다. 현실은 아니지만 보다 현실적인 가상의 세계관이 진짜는 아니지만 보다 진짜 같은 가상인간과 접점을 이루며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이들은 그 자체로 트렌드가 되고 있다. 기획사에서 보면 아이돌이라는 개념이 될 수도 있겠으나 여러 미디어에 등장하는 순간 콘텐츠라는 폭넓은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겠다. 대중들과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것, 연예인들과 달리 아무런 스캔들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사람의 외형과 꼭 닮은꼴이지만 '완전무결함' 자체는 사실 인위적으로 느껴질 수 있어 이를 수용하는 사람에 따라 거부감이 들 수도 있겠다. 외형적인 모습을 포함하여 성향까지도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느낌 자체가 거부감으로 이어지게 되면 가상인간의 트렌드를 약화시킬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어떨까? 메타버스라는 가상의 세계를 동경하거나 몰입하는 사용자들에게 가상인간은 전혀 어색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저 신비로운 존재감을 뿜어내는 또 다른 세계의 인류라는 개념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들의 존폐 여부를 가르는 것은 역시 트렌드가 아닐까? 메타버스라는 키워드가 형성되는 순간부터 가상현실의 개념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언급했던 VR의 단순한 의미 그 이상이 되면서 특정 세계관으로 자리했다. 그리고 여기에 가상인간이 탄생하게 되면서 우리의 현실과 삶에 머물러 공존하고 있다. 가상인간이 MZ세대를 겨냥한 콘텐츠라면 시대가 변하고 세대가 달라지더라도 트렌드의 지속성을 온전히 가져갈 수 있을까? 트렌드나 유행이라는 것은 돌고 돌며 또 언젠가 세대를 거쳐 돌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영원히 지속할 순 없는 법이다. 메타버스라는 세계관 또한 허황된 개념이라는 리스크를 피해 갈 수 없다면 한순간에 무너져버릴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Z세대가 주축이 되는 소비 시장의 주도권과 이를 겨냥한 새로운 마케팅 기법의 시도는 '당분간' 이어지게 될 것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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