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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K Feb 18. 2016

영화 <대니쉬 걸>

최고의 릴리 엘베 헌정 영화,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슬픈 부인은?

※ 리뷰를 읽으시기 전 '소수자'를 다룬 영화이기에 옹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뒤로가기 눌러주세요


어쩌다 보니 캐롤 다음 영화 리뷰가 대니쉬 걸이 되어버렸네요. 퀴어예술만 가려서 관람하는 것은 결코 아님에도 이번 달에 같은 퀴어영화임에도 어째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영화가 꽤 화제가 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릴리 엘베(Lili Elbe)


최초의 트랜스섹슈얼(Transsexual)로 일찍이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입니다.(중요한 것은 수술을 했던 최초의 트랜스젠더라는 것이지 그가 최초의 트랜스젠더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실 그리고 그는 최초의 트랜스섹슈얼도 아닙니다. 도라 리히터(Dora  Richter)라는 인물이 더 먼저지요. 아마 트랜스젠더라 불리는 사람들은 그 전에도 존재했을 것입니다.)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켰던 1931년 무려 '자궁'과 '난소'를 이식받고 거부반응으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는 전설적인 인물임에는 분명합니다. 게다가 영화의 상당 부분이 실화이기 때문에 21세기임에도 꽤 보수적인 대한민국에서는 '이게 1930년대의 일이라니'라고 놀랄 수도 있겠지요.


성별 재지정(Sex Reassignment)은 커녕 동성애조차도 질병으로 여겨지고 전후의 어수선하던 시기 그들의 사랑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일이었을 겁니다. 실제로도 게르다 베게너는 릴리 엘베를 그린 초상화를 아이나 베게너의 여동생이라고 말하면서 전시했다고 하니, 이 둘의 관계는 현재로서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화의 줄거리와 내용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할 수 있을지는 모르곘으나, 아마 이 영화를 본 모든 사람들이 영화의 배경이 너무나도 예쁘다는 데에는 동의할 겁니다.

실제로 영화 속 덴마크, 파리, 그리고 드레스덴의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특히 코펜하겐 거리과 당시 유럽의 시장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낸 듯한 느낌은 영화를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다 어느새 거리 안으로 깊이 빠져들어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되기도 했지요.

이러한 장면들이 전후 미국의 모습을 아름답게 그려냈던 '캐롤'만큼이나 따뜻하고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더욱 더 하나의 그림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게다가 선정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아이나 베게너의 성기노출 장면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지요.

아이나 베게너가 화가로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리고 고향의 그 풍경만을 그려냈던 이유는 그 풍경 안에서만 진짜 본인인 릴리가 존재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면에서 아이나 베게너, 혹은 릴리 엘베를 연기했던 에디 레드메인의 연기는 최고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트랜스젠더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에서 주연으로 '신체적 남성'인 배우를 택할지 '신체적 여성'인 배우를 택할지는 큰 고민이 될 수 있습니다. '신체적인 불완전함'과 '여성적인 감정'을 동시에 연기한다는 것이 제가 생각해도 굉장히 어려운 일일 듯하거든요. 분명 에디 레드메인은 처음에는 완전한 '아이나'였던 것 같은데, 나중에는 정말로 '릴리'로 보이게 됩니다.


이러한 면에서 '대니쉬 걸'은 최고의 릴리 엘베 헌정 영화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영화의 진 히로인이 알리시아 비칸데르가 연기한 '게르다 베게너'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이나 베게너의 고민이 조금밖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마 소설에서는 훨씬 더 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상황에서는 아이나 베게너의 고민이 어느 누구보다도 깊었을 겁니다. 그런데 게르다의 고민, 남편으로서의 아이나를 필요로 하고 요구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내로서 지원해주고 응원해주는 남편의 본래 모습인 릴리가 웃음, 울음, 배웅하면서도 다시 지키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극적으로 드러남에 반해서...

아이나 베게너는 그저 '할 수 없어', '없어' 정도로 일관합니다.

이런 14살 사춘기 여자아이 같은 태도로 화가 대신 여자로 살겠다니 기가 막힙니다. 그럼 게르다 베게너는요?

그 시대에 살던 어떤 부인들보다도 슬픈 삶을 살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그녀는 1940년 생을 마감합니다.


물론 아이너 베게너가 정말로 그렇게 일관하지는 않았겠지요. 남편으로서의 자신의 위치, 영화에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20세기 초 보수적인 서구사회에서의 편견, 여전히 게르다를 사랑하는 본인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까지 더해져서 아마 누구보다 힘들고 어려운 고민을 하셨을 겁니다.

다만 영화에서 드러나지 않을 뿐.


더불어서, 인터섹슈얼(Intersexual)을 의심할 수도 있는 한달에 한 번 있는 생리 비스무레 한 것에 대한 장면은 해결되지 않을 장면을 왜 넣었을까요? 저는 아직도 그 장면이 왜 들어가 있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찾아보니 릴리 엘베가 인터섹슈얼이 아니었을지에 대한 이슈는 존재한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번역도 군데군데 일부러 이렇게 번역한 건지 의심되는 부분이 몇 있어서 더 완성도를 떨어뜨렸지요.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영화에 감사해야 한다


저는 릴리 엘베가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없었다면 현재의 트랜스젠더 운동은 어쩌면 몇십 년은 늦춰졌을 지도 모릅니다.

의학적인 도움을 기대할 수도 없었을 거고요.


그래서 더더욱 그가 했을 고민에 대해 쉽게 넘어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했던 고민은 당시에도 있었지만, 현재도 너무나도 많이 존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적소수자들에게 고민을 많이 하게 만드는 사회적인 압력, 가정적이 압력에 대한 이야기들은 차치하기로 합시다.)


그 고민을 덜 수 있도록 우리가 고민을 더 많이 하는 것

릴리 엘베가 세대를 앞서가서 우리에게 하려 했던 말이 아닐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릴리 엘베 씨.



<실제 부부이던 시절의 게르다 베게너(좌), 아이나 베게너(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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