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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주 Nov 01. 2023

서랍 속 쌓아두던 약봉투를 버리며

허리디스크 환자의 재활일기, 마지막



 2020년 5월, 잔병치레 같던 허리 통증이 급격히 악화되어 119에 실려간 날 받은 진단은 '척추 추간판 탈출증' 즉 허리 디스크였다. 그날 이후 우리 집 항시대기 품목(예를 들어 롤휴지라던지, 생리대 같은)에 척추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이 추가되었고 서랍 한 칸을 가득 채운 약봉지는 마를 날이 없었다.


약봉투에는 진통제, 소염제, 위 보호제까지 3개의 알약이 귀엽게 담겨 있는데 이것들은 허리가 아팠을 때 겪는 불편함과 심리적 불안감을 줄여주는 요긴한 '약'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약은 내 질병을 치료해주지는 않는다. 아픔을 잠시 잊게 하는 진통제와 디스크로 인한 다른 부위의 염증을 예방하는 소염제, 놀부 아내가 흥부의 뺨을 후려친 주걱에 묻은 따듯한 쌀알 같은 위 보호제는 일시적인 통증을 멎게 해주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랍 속에 늘 약봉지가 가득 차 있어야 마음이 편안했던 이유는 언제 찾아올지 모를 악화 증세에 대한 대비책, 마지막 보루였다.


4시간을 내달려야 도착하는 친정집에 가는 명절,

서울 친구들과 만나기 위해 중간 지점인 대전까지 가야 할 일정이 잡힐 때,

또는 직장생활 중 피할 수 없는 출장 일정이 잡힐 때면 교통수단(고속·시외버스는 진동이 심해 허리가 더 아프다)이나 이동 시간, 거리에 따라 미리 처방약을 먹고 대비를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약의 재고에 대해 강박 아닌 강박이 생겼던 것.


그런 강박에 의해 차곡차곡 쌓아두던 약봉지들을 지난 주말 가을맞이 대청소를 하며 한 봉지의 여지도 없이 모두 버렸다. 작년 여름 받아온 약이 복용 권장 기간을 훌쩍 넘기기도 했고, 더 이상 약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보고 신랑은 기쁨과 감동을 함께 느꼈다고 했다.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나의 병치레를 함께 감당해 준 사람으로서 응당 느껴야 할 감정을 이제야 전달한 것 같아 조금 미안하기도, 고맙기도.




2020년 5월부터 2023년 11월 현재까지. 2년 7개월 동안 감기처럼 앓고 있는 허리 디스크에 더 이상 몸도 마음도 휘둘리지 않겠다는 등의 대단한 결심을 했다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수순이라고 생각했고 그 바탕에는 그동안 꾸준히 걷고 아파트 헬스장을 드나들며 늘린 근육의 무게만큼 묵직해진 자신감이 있다. 산전수전 다 겪어본 자의 여유랄까. 덕분에 용감 혹은 과감하게 약 봉투를 모두 처분할 수 있었다.


허리 디스크라는 것이 평생 관리해야 하는 질병 중 하나이니만큼, 허리 통증이 지금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아플 것 같을 때, 아프지 않아야 할 때, 아팠을 때 무엇을 어떻게 할지 스스로 핸들링이 되는 지점에 도달했다는 자각은 나를 자유롭게 한다.


비워진 서랍처럼 후련하다.


앞으로의 내 삶에 허리 디스크라는 고질병은 완전히 사라질 리 만무함을 알고 있다. 언젠가는 척추뼈 사이에 있는 나의 디스크가 닳아 없어져 남들보다 빨리 굽은 허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예상하며 산다. 이런 사실에 심신이 좌초되어 주저앉아 약봉지만 만지작거리기보다는 조금 더 부지런히, 조금 더 경쾌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걷고 운동하는 것이 불안한 마음의 중심을 잡아줄 마지막 보루임을 깨닫는 요즘.


오늘도 내일도 어디선가 올바른 자세로 걷고 있을 나를 응원하며, 허리 디스크 환자의 재활 일기는 마침표를 찍기로 한다.


허리가 아프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괴로워했을 엄마에게

단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이 나를 대신해 무거운 것들을 들어주는 신랑에게

피곤함에 누워만 있고 싶은 나를 일으켜 세워 걷게 해 준 나무에게 

끝없는 감사와 사랑을 전하며.



2023. 11. 




<지난 2년 7개월 동안 꾸준히 해온 재활 생활의 기록>

1. 매일 아침 10~20분 강아지와 걷기

2. 매일 저녁 4~50분 강아지와 걷기

3. 등, 어깨, 하체 근력 운동 (주 2~3회, 30분 이상) 

4. 바른 자세로 앉기 연습 (두 번째로 어려웠던 일, 아직도 잘 해내지 못하고 있다) 

5. 바른 자세로 걷기 연습 (제일 어렵고, 아직도 걸을 때마다 신경을 쓰고 있다)

6. 기상 후 스트레칭 5분 

7. 무거운 것, 땅에 떨어진 것 들 때 요추전만 자세 유지하고 하체 힘으로 일어서기

8. 옆 사람에게 부탁하는 말에 미안해하기보다 고마워 하기

9. 내가 아픈 것을 약점으로 느끼지 않고, 무기로 사용하지 않기

10. 통증에 솔직해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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