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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주 Mar 24. 2024

내일 쉬고 싶으면 쉴 수 있다는 것

"저 내일 쉴게요"

"무슨 일? 없어요. 그냥 쉬고 싶을 때 쉬는 거죠"




계획은 없다. 포털사이트 메인 화면에서 내일은 날씨가 맑다는 일기예보가 반가웠고, 당장 해내야 할 과업도 없는 요즘. 즉흥적으로 휴가를 냈고 내일은 출근 안 한다는 사실이 즐거워 발을 동동 굴리며 쇼파에 앉아 강아지나 만지작 거리고 있는 내게 신랑이 묻는다. "내일 뭐 하게?"

- 나도 몰라. 뭐 없엉♪

우물거리며 대답하자 제일 좋은 계획을 갖고 있다며 키도 작지 않은 나를 강아지 만지작 거리듯 쓰다듬는다. 나른한 밤.



평일에 연차를 내는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가 대부분이다. 은행업무나 병원에 들른다던지, 단정하고 착하게 우리를 기다려주는 반려견과 진득하기 시간을 보내기 위함이거나 마음이 번잡해 조용히 집안 청소를 하고 싶다던지였지만 내일만큼은 세수도 하지 않고 뒹굴거리리라 입술을 앙다물며 다짐한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출근하는 신랑을 약 올리듯 배웅하고 온기가 남은 침대에 다시 쏙 몸을 뉘었다.

근데 나 오늘 왜 쉰 거임? 자문했지만 몰라 그게 중요하냐는 자답이 바로 튀어나와 괜히 익살스러운 하루가 시작된 기분에 마음이 붕 뜬다. 이내 좀이 쑤셔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와 커피를 내렸다. 향이 좋다. 가득 찬 설거지통이 눈에 들어와 무의식적으로 반 발자국 다가섰지만 뒷걸음질 치며 오늘은~ 하고 애써 무시해 보기로 했다. TV도 켜지 않고 쇼파에 앉아 창 밖을 보며 커피를 마시니 오전에 집안으로 채광이 잘 들어옴에 만족스럽다. 울 강쥐 내내 따듯했겠군! 다행이다.



서른 중반이 넘어가며 자주 20대를 떠올린다. 대비점이 많아서 더 그렇다.

연말까지 방치해 둔 연차들이 모여 보상금으로 돌아오던 그때. 뭐 한다고 쉬지도 않고 매일 성실히 똑같은 지하철역, 똑같은 건물, 똑같은 층수의 자리에 앉아 있겠다고 지냈을까? 뭐, 지금도 비슷하게 살긴 하지만.


때로는 오늘처럼 연차를 내고 전시회를 가고 쇼핑도 하고 오래간만에 친구를 만나 회포도 풀며 보냈지만 늘 그날 밤은 충족스럽지 않은 하루였던 기억이 난다. 어딘가 모르게 초조하고 불안했던 그날들의 밤. 이럴 바에 나가서 일이나 하자, 연차 보상비 받고 연말에 셀프 선물이나 사주자며 푸른데 맑기까지 한 청춘의 시간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냈던 시간들.


괜히 웃음이 난다. 뭐 그리 대단한 삶을 일궈보겠다며 초조함 같은 것에 발 묶여 살았는지. 그래서 그 초조함의 답은 찾은 건지? 서울의 4년제 대학씩이나 나와 남부럽지 않은 직장 커리어도 마다하고 지금은 작은 지방의 소도시에서 스물 일곱 즈음받았던 월급정도만 받으며 야근하지 않는 직장이 최고라는 듯 살 줄 알았더라면. 그 당시 조금 더 편하게 가볍게 실컷 놀면서 살 걸 그랬나? 약간의 자조적 웃음과 약간의 승리의 미소가 동시에 흘러나와 이질적이게 느껴졌다.



그래서 휴가 내고 뭘 했냐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강아지와 매일 하던 산책을 숙제처럼 해내고, 이불정리도 하지 않은 채 뒹굴거리다 TV를 보다 책 몇 장 뒤적이다 낮잠이 들었다가 깨니 퇴근시간이 다 되어간다.


베이스캠프로 간신히 돌아온 전장의 용사 같은 얼굴로, 귀가하는 신랑을 맞이하며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약 올려 주고 치킨 시켜 먹자고 해야지, 흥얼거리며 ㅡ그 어떤 것의 방해 없이(직장 상사, 업무, 상위기관이나 협업사, 건강이나 일상의 이슈 등) 나의 선택으로 나의 하루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에 꽤나 큰 만족감을 느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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