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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주 Mar 30. 2024

싫은 것에서부터 찾는 좋은 것



소음에서 묵음으로


TV소리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내재적으로 영양분을 얻지 못하는 행위가 소모적이고 불필요하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 같다. 머릿속을 비우기에 적당한 예능과 유튜브 채널들을 멍하게 쳐다보는 시간이 부쩍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음에 예민한 성향도 한몫 거들었다. 사람이 붐비는 번화가나 시끄러운 음악이 벙벙 울리는 카페도 좋아하지 않는데 ㅡ온전히 휴식을 취하고 싶은 집에서조차 소음에 시달리는 모양새가 싫었던 모양. 

그래서 조금 더 좋아하는 것들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좋아하는 것이 조용한 공간이니, 그걸 만들어보고자 책상을 구입했다. 조용한 책상에 앉아 일기라도 끄적여보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작은 것부터 해보자. 가벼운 마음으로 주문한 하얗고 단정한 책상 배송이 완료되자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사실 책상구입은 몇 개월 전부터 고민하던 것이었는데 우연히 취미 삼아 시작한 부업으로 작년에 꽤 쏠쏠한 부수익을 올리는데 재미가 들렸기 때문이다. 책상을 사기 전에는 거실에 혼자 있기 싫어하는 (정확히 말하면 내가 본인의 근거리에 있길 원하는) 신랑을 위해 식탁에서 주로 작업을 하곤 했는데 tv의 소음과 그것을 보며 리액션을 하는 신랑의 말에 반응해주다 보니 방해받는 기분이 점점 강해졌다. (신랑 미안) 이런 생각이 그에게 퍽 서운할까 걱정되어 몇 개월째 장바구니에만 담아두던 책상을 결제하겠노라 선언하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퇴근 후 강아지와 실컷 산책하고, 서로의 밥을 챙겨 먹고 빨래나 설거지를 한 후 남는 시간에 책상이 있는 서재 방으로 들어가 일기를 쓰고 노트북을 켜 블로깅이나 브런치 글을 쓰는 고작 1시간 남짓한 시간. 고요함으로 가득 찬 이 시간 덕분에 고단했던 하루에 기꺼이 안녕을 고할 수 있어 흡족하다. 






전자책 말고 종이책. 


토요일 늦은 밤, tv를 보다 코를 골며 잠이 든 신랑의 손에서 슬며시 리모컨을 빼내었다. 왕왕 울리는 유튜브 개그 채널을 탁, 꺼버리고 실시간 채널을 돌리며 볼거리를 찾다가 세계의 명화 프로 광고방송 중이었고 상영 예정작은 '가위손(1991, 미국)'이었다. 반갑고 설레는 마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오래도록 영화를 보다가 잠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세계의 명화를 좋아했다. 주말 늦은 밤 상영을 시작하는 이 프로그램은 모두가 잠든 틈을 타 보는 것이 가장 맛있다. 아버지가 다 보고 아무렇게나 던져둔 신문지를 슬쩍 가지고 방에 들어가 오늘의 상영작이 뭘까 맨 뒷장의 편성표 페이지를 뒤적이면 명치 부근이 간질간질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네덜란드 영화 '블라인드(2007)'. 이야기의 골자는 후천적으로 시각장애를 갖게 부잣집 도련님과 그를 돌보는 괴상한 피부병을 가진 가정부 마리가 사랑에 빠지고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 진부하지만 진부할 수 없는 스토리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지금까지도 손에 꼽는 My Movie라고 부르는 이유는 겨울을 배경으로 한 영화의 모든 장면과 연출이 극적인 미장센을 완성해 주어 아름답다는 말이 절로 나오기 때문. 이 영화를 기점으로 더욱이 토요일 밤의 명화를 챙겨봤던 기억이 난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이 프로그램을 챙겨보는 일은 서서히 줄었고 점차 기억에서 멀어졌었는데, 서른일곱의 어느 토요일에도 명화는 흐르고 있었다니. 그것도 가위손이라니! 


여러 OTT플랫폼과 유튜브, 언제든 갈 수 있는 영화관의 수가 늘어나면서 진득하게 무언갈 '감상'하는 일이 현저히 줄어드는 것도 같다. 시청과 감상은 엄연히 다른 차원이니까. 눈과 귀는 즐겁지만 남는 게 없는 느낌이랄까. 더구나 숏폼의 대 성수기라고 할 수 있는 요즘은, '블라인드'에서 느꼈던 아름다움을 느끼기엔 러닝 타임이 턱 없이 짧다. 그렇게 소모적인 콘텐츠에 염증을 느끼던 찰나에 "무려 가위손이라니!!"



사실 나는 아직도 광고 없이 보는 유튜브보다 실시간으로 방송국에서 쏴주는 TV프로그램이 더 정감이 간다. 화장실을 가거나 물 한잔 마시고 돌아오면 주요 장면을 놓칠 때도 있지만, 또 그것이 종종 옆 사람과 대화의 소재도 되곤 하니까. 방송과 콘텐츠는 종이책과 전자책 같은 느낌이다. 샤프보다는 연필의 사각거림이, 이메일과 카톡보다는 꾹꾹 눌러쓴 엽서나 편지가 더 좋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여행을 갈 때에도 모바일 앱 지도를 참고하지만, 관광안내소에 들러 종이 지도를 꼭 챙긴다. 기념품이라도 될 수 있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 대부분은 적당히 느린 속도감으로, 앞선 시대를 관망하는 듯 여유로운 것들이다. 느림과 여백, 고요함과 차분함에서 오는 미학만이 오롯이 본연의 미(美)를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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