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판(濟阪)항로 100년] [제주인 일본 정착 史2]
‘엿을 팔았다’는 사연이 대단하지는 않지만 그 안에 있는 맥락은 흥미롭다. 남의 나라, 말도 통하지 않고 그렇다고 돈도 없는 상황에서 별별 궁리를 다 했을 일이다. 한일합병 즈음 일본 내에서 조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도 있겠지만 당시 ‘조선엿’이라 표기해 판매했던 포장을 보면 묽은 조청보다는 고두밥을 엿기름물에 삭힌 뒤 졸여 만든 갱엿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조센아메(朝鮮飴)’의 배경이 보태지면 당시 그 엿이란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궁금증이 더해진다. ‘엿이 엿이지 뭐’하기에는 뭔가 흥미롭다.
일본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에서는 400년 이상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의 엿을 만들어 온 '소노다야(園田屋)'가 있다. 우리말로 옮기면 ‘조선엿’인 조센아메가 소노다야의 400년 넘은 전통에 더해 지역 명물로 자리잡은 사연은 드라마같다.
조센아메는 16세기 소노다야의 창업자 소노다 다케몬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 당시는 '조센아메(長生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소노다 다케몬은 당시 지역의 영주 가토 기요마사에게 이 조센아메를 바쳤는데, 가토 기요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우리나라와는 임진왜란 때 대군사를 이끌고 출병한 장본인으로 당시 자신이 데리고 간 군사들이 먹을 비상식량으로 이 조센아메를 챙겼다가 유용하게 활용한 뒤 이름의 한자를 ‘조선(朝鮮)’으로 바꿨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설은 이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귀국할 때 조선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왔는데 이들이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엿을 만들어 먹었고 이것이 지역에도 퍼졌다는 얘기다.
일단 ‘조선’이란 단어에 끌리지만 실제 먹어보면 ‘이게 엿이야’하는 반응이 나온다. 떡 같은 식감에 좀 더 폭신폭신한 느낌으로 단맛이 은근하게 나는 것이 우리 느낌으로는 떡에 가깝다. 부드럽다. 오히려 우리 떡보다 훨씬 부드럽다. 씹는 순간 젤리처럼 '쑤~욱'하고 엿 속으로 이가 들어간다. 그러면서도 달다. 아니 첫 맛부터 느껴지는 단맛이 아니라, 한 번 씹은 한참 후에나 '아! 달구나'라고 느낄 만큼 담백함 속에 단맛이 숨어있는 소박한 느낌이라고 할까.
찹쌀과 물엿을 재료로 은근한 불한 오래 졸여 만드는 것을 보면 당최 어느 것이 원조인지 말하기도 어렵다. 이 것이 유명세를 타고 구마모토의 명물이 된 것은 메이지 시대였던 1877년 전국과자박람회에서 우승하면서 부터다.
제주를 비롯해 자기 의지로 일본에 건너간 사람들이 이런 고급스러운 과자를 만들어 팔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장 밥 한 그릇 챙기기도 힘든데 배고픔까지 견디며 엿을 만들어 팔았다는 말이 가당키나 할까 하는 말도 수긍이 간다.
하지만 조금 비틀어본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싶은 부분이 있다. 엿을 만드는 작업만 보는 것이 아니라 전후 과정을 살펴보면 제법 솔깃하다. 쌀이 귀했던 제주에서는 잡곡류를 배경으로 한 식문화가 발전했다. 전분기가 있는 것들에 엿기름을 넣고 졸여 단맛을 내면 엿과 조청이 됐고, 누룩을 넣어 발효하면 술이 됐다. 어느 쪽이든 고달픈 삶을 위로하는 역할을 했으니 경험을 바탕으로 자본과 차별의 한계를 넘었다고 해석할 수 있으리라.
재일한국인 1세대의 ‘기억’을 정리한 자료를 보면 이런 해석이 단순한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에서 온 믿을 구석 하나없는 하층민 취급을 받았고, 해방 후에는 귀국한 일본인들로부터 자신들이 먹고 살 일자리를 차지한 약삭빠른 외국인으로 폄하됐다.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 일본인들은 돈을 줘도 하지 않는 가장 험하고 노동강도가 세거나 품삯이 싼 일들이 재일한국인들에게 주어졌고 그 것만으로는 버티기 어려웠던 절박함이 지난 경험들과 버무려지며 부업의 영역을 만들었다.
당시 공개적으로 할 수 있었던 일은 공사장 막노동이나 고철을 파는 그도 아니면 분뇨 처리를 하는 일을 했다. 저렴한 인건비로 청소나 접시닦이를 했고 신발이나 벨벳 제조 등 가내 수공업이나 각종 수선업을 했다. 조선엿을 파는 것 외에 밀주(도부로쿠‧とぶろく‧탁주)를 만들어 몰래 거래하는 것으로 생활비를 충당했다.
연매출 100조원의 대기업 소프트뱅크 창업자인 손정의 회장의 자서전이나 재일한국인 최초로 도쿄대 교수가 된 강상중 명예교수의 책에서 ‘밀주’라는 단어를 찾을 수 있는 것도 이런 배경에 근거한다. ‘오모니(オモニ·어머니)’의 고생담과 그 힘으로 자리를 잡게 된 과정, 그 안에서 배운 철학과 교훈이 그들을 만들었다고 했다.
어느 시절부터 밀주를 만들었는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일본의 대대적인 밀주 단속이 이뤄졌던 것이 1940년대를 전후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미 그 이전부터 암암리에 만들었고 처음 자체 소비를 하던 것이 주변으로 확산됐음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역시 시장 혼란 등의 이유보다는 조선인을 장악하기 위한 방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프다.
일본에 한국 막걸리 붐이 일었던 2009년 현지에서 진행한 맛걸리 품평회에 참여했던 한 일본인이 꺼낸 막걸리의 기억을 보태본다.
“<가호쿠(하북)신보>의 마나카 지로는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오늘 마신 막걸리가 다 좋았다"며 말을 걸어왔다. 언제 처음 막걸리를 마셔 봤는지 물었다. "이번 방문 전에 일본에서는 한국 막걸리를 안 마셔 봤다. 도부로쿠는 마셔 봤다. 올해 내 나이 예순아홉이다. 미야기현(도호쿠 지방 태평양 연안에 있는 현)에서 태어난 1940년대 고향 마을에 있던 재일동포들이 가가호호 담그던 막걸리 냄새가 아직도 기억난다. 어릴 적 같은 마을의 재일동포 친구들이 '할아버지가 만들었다'며 막걸리를 갖다줘 자연스럽게 한국 막걸리를 처음 마셨다. 도부로쿠와 큰 차이는 느끼지 못했다."
* 대문 사진 - 조지현 <이카이노-일본 속 작은 제주>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