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제주 살아요 - 대정읍 시계탑 상점 거리의 '터무늬'
“그래서 어느 길이 궁금한 건데?”
제주향토사학자 김웅철 대정현 역사문예포럼 이사장(75)은 길을 묻는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김 이사장에게 ‘찐빵’ 얘기를 꺼냈다. 순간 너털웃음이 터져 나온다.
태어나 지금까지 주민등록 한 번 옮겨본 적 없는 토박이, 평생 수집한 역사 자료만 1만 8,500여 점이 넘는 전문가에게 너무 가벼운 질문이었던 걸까. 한참 생각에 빠졌던 김 이사장은 “사설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자료에도 뭔가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여기 이건 어떨까.”하고 사진 한 장을 꺼냈다.
흑백 사진 속에 보리타작을 돕는 군인의 모습이 등장한다. 한국전쟁 당시 육군 제 1훈련소가 설치됐던 즈음의 자료다. “그때 대정은 상황이 많이 안 좋았다. 보리를 많이 재배했는데도 늘 배가 고팠어. 그러고 보니 찐빵도 꽤 많이 먹었었네.”
대정읍 얘기는 풀어도 풀어도 끝이 없다. 김 이사장은 “대정읍이 아니라 대정현”이라고 강조하며, 조선시대 유배·민란부터 일제강점기, 제주4·3, 한국전쟁에 이르는 굵직한 역사의 흐름 한 가운데 있었던 마을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찐빵 얘기에 바로 보리를 많이 키웠던 시절을 떠올렸다. 군인들이 보리타작 지원을 나왔던 배경이 궁금했다.
강 이사장은 “모슬포 들어오다 보면 해병대 부대가 보이는데 거기 큰 기둥 두 개가 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이 사용하던 건물을 광복 이후 강병대, 그러니까 육군 제 1훈련소로 썼는데 그 기둥이 정문이 있던 자리.”라며 “농사를 지어야 하는 데 일할 사람이 없으니, 군인들이 나와서 도울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알지 않냐, 대정에 일이 많았다. 일제강점기 때는 끌려가 길을 만들고 격납고 공사를 했고, 한국전쟁 때 군대 간 사람도 많고. 사람을 구해 겨우 일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은 때였다.”며 “마을에서 나는 곡식으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걸 만들었던 게 이 동네 찐빵의 시작이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대정에는 한국전쟁 때 피난민촌이 들어섰다. ‘맥내브 컴파운드’라고 부르던 미군 부대도 있었다. 당시부터 상권이 형성됐을 정도로 역사가 오랜 거리인 만큼 노포들도 많았다. 모슬포 시계탑 상가 거리라 부르는 곳이다. 2000년대 초반 시계탑 인근 하모리 공유수면 매립지로 상권이 옮겨가기는 했지만, 여전히 문을 여는 가게가 남아있다.
피난민촌과 미군 부대하면 밀가루가 연상된다. 조선 시대 ‘진가루’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귀한 대접을 받았던 밀가루는 전쟁 이후 원조 밀가루와 1960~70년대 분식 장려 운동 시대를 지나며 지역에 크고 작은 변화를 만들었다.
‘대정’은 조선 대정현 시절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항구를 통해 문물이 들어왔던 주요 관문이었다. 그래서 모슬포항 등 바다에 닿는 신작로도 일찍 났다. 그 길을 따라 산업과 상업이 발전했고 또 ‘신식’이라 부르는 것들도 일찍 들어왔다. 작업환경이 열악하고 노동력이 부족했던 시절에 따로 참이나 식사를 준비할 여력이 없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추정된다. 그 모든 것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움직이며, 그때는 미처 몰랐던 마을의 특화한 무엇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정에서 나고 자란 김계숙 해녀(72‧대정읍 동일리)는 “찐빵을 처음 먹었던 게 60년 정도 된 것 같다”며 “먹을 것이 없어서 보리밥, 보리빵만 먹다가 찐빵이 나와서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밭에 일하는 어른들 새참으로 심부름도 많이 했다”고 기억했다. 김 해녀의 기억대로라면 당시 읍내 모슬포 시계탑 상가거리를 따라 10여 곳의 찐빵 가게가 성업했다.
비슷한 시절을 살았던 성산읍 출신 김동욱(74‧제주시 삼도1동) 씨는 “중학교 때 ‘동남’(성산읍 고성리의 상업지역을 가리키는 지명. 지역 주민들은 고성오일시장을 ‘동남장’이라고도 부른다)까지 나가서 꿀빵을 사먹었다.”며 “밀가루 반죽을 만두만큼 빚어 찌어낸 빵 위에 꿀을 발라서 정말 맛있었다. 꿀빵 사 먹느라 버스비를 써버려서 집까지 걸어서 가곤 했다”는 다른 기억을 말했다.
찐빵에 얽힌 사연은 모슬포 중앙시장 가는 길 시계탑 근처 신세계제과점(1983), 온누리빵집(1986)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백년가게’인 신세계제과점 김준형 대표(58)의 찐빵 경력은 빵집의 나이와 같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어머니(허연화·86)를 도와 빵집 문을 여닫았다. 가게 간판을 달았던 것이 마침 그때였을 뿐, 찐빵을 만들어 판 내력은 60년이 훨씬 넘었을 때였다.
김 대표는 “어머니 말씀이 시집와서 보니 집에서 빵을 쪄서 팔고 있었다고 하셨다. 1960년대였는데도 새참으로 찐빵을 팔았을 정도였다고 했다. 이후에 만물상이며 분식점을 했는데 찐빵만큼 잘 팔렸던 것이 없어 가게를 냈다고 들었다.”고 한다. 신세계제과점에서는 한창때 솜씨 좋은 사람을 두고 하루 몇 번씩 찐빵을 쪄냈었다. 새참용부터 공사장 간식용, 명절·행사용 등 꽤 수요가 많았지만, 지금은 몇 군데 빵집에서 사서 먹는 간식으로 남았다.
1933년 4월 5일부터 1980년 6월 5일까지 대정읍(면)사무소로 썼던 대정현 역사자료 전시관(2018년 개관)을 따라 시계탑을 끼고 모슬포항까지 이어지는 길에는 이제는 기억에만 있는 제주 영화 1세대 모슬포 극장(1963년 개관)이나 지역 유통매장 자리의 대정읍민관이 있었다.
대정읍민관 이전에는 모슬포경찰서 관할 절간 고구마 창고였다.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으로 잡혀 왔던 사람들이 수용됐다가 송악산 섯알오름으로 끌려가 유명을 달리했던 아픈 역사(백조일손지묘)도 품고 있다. 이제야 터놓고 할 수 있는 얘기가 됐지만, 그 당시 고구마 창고에서 섯알오름까지 이어지는 길에 가족들에게 자신의 흔적을 알리기 위해 벗어놓은 신발이 마치 눈물처럼 뚝뚝 떨어져 있던 광경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주섬주섬 시간을, 기억을 챙기고 돌아오는 길에 승효상 건축가의 ‘터무늬(터에 새겨진 무늬)’론이 떠올랐다. 승 건축가는 공동체의 기억과 지문(地紋, Landscript)이 살아있는 ‘터무늬’의 회복을 육체와 영혼이 유기체로 거주하는 집과 동네, 공동체로서의 도시 비전으로 제시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조금은 막연하게 느껴졌던 그 말이, 대정산(産) 찐빵 몇 개를 씹는 동안 가닥이 잡히는 느낌이 들었다.
터무늬는 제대로 보려는 사람들에게만 존재를 내보인다. 그 땅에 묻혀 있는 사람들의 흔적을 살리는 일은 새로운 랜드마크를 만드는 것보다 더 의미가 있다. 그것을 대정의 오래된 길의 흔적을 따라 걸으면서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