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공감하기 -교토국제고가 쓴 역사에서 읽어야 할 것
지난 2021년 봄의 일이다.
외국계 학교로는 처음으로 당시 98년 역사의 일본 ‘고시엔(甲子園‧전국고교야구대회)’에 진출한 학교가 첫 경기 승리를 기록했다는 뉴스가 바다를 건너왔다. 무려 한국계 학교인 교토 국제고등학교다. 그해 봄에 이어 여름 고시엔에도 출전했다. 지난해 봄 대회까지 세차례 연속 지역 대표로 전국 대회에 참가하며 실력을 자랑했다. 우승을 할 때까지 도전을 멈추지 않겠다며 울음을 삼키며 야구장의 흙을 담아 가는 모습을 아직 기억한다.
그리고 여느해 보다 더웠다는 2024년 여름. 한국어 교가를 부르는, 전교생 160명의 한국계 민족학교가 ‘여름 고시엔(甲子園)’으로 불리는 일본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서 개교 77년 만에 처음으로 우승했다. 연장 승부까지 가는 접전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 가득 흥분과 감동을 감추지 못한 선수들이 교가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오래 기억할 예정이다.
벌써 몇 해 "동해 바다 건너서 야마도(大和·야마토)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라는 한국어 교가가 울려 퍼졌지만 올해 유독 주목 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 마침 역사관 논쟁과 유네스코세계유산 등재(사도광산)‧독도 문제 등을 둘러싼 복잡한 사정이 국내를 흔들고 있는 터라 ‘한국계’라는 자존감을 지키고 있는 청춘들의 열정을 흘려 볼 수 없었을 일이다. 인정한다.
다만 그 안에서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을 놓치지 않았으면 싶다.
교토에서의 독립운동은 윤동주.송몽규 선생 등을 통해 알려진다. 송몽규 독립운동가는 1942년 4월 교토제국대학에 입학한 후 교토에서 사촌인 윤동주 등과 함께 민족정신 운동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일본은 1943년 7월 ‘재교토 조선인학생 민족주의그룹 사건’의 주동 인물로 선생과 윤동주를 함께 체포했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돼 1945년 3월 28세 나이로 옥중 순국했다.
교토국제학원은 1947년 재일한국인들이 민족 교육을 위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세운 교토조선중학교로 시작한다. 이후 1958년 학교법인 교토한국학원 설립을 승인받았고, 1963년에는 고등부를 개교했다. 한국 정부의 중학교, 고등학교 설립 인가에 이어 2003년에는 일본 정부의 정식 학교 인가도 받았다. 현재 이름은 2004년부터 썼다.
교육부 재외교육기관학교포털을 보면, 교토국제고 학생 수는 2024학년도 기준 137명으로 여학생 69명, 남학생 68명이다. 재학생 국적(중학교 과정 22명 포함)은 일본 학생이 127명이며 30명 정도가 한국계다.
재일한국인들이 많이 모여 있는 도쿄와 오사카에 대한 이야기는 꽤 전해지지만 교토는 사정이 다르다. 시즌2에 들어간 OTT드라마 ‘파친코’를 보면 당시 사정을 읽을 수 있다.
1910년의 한일합방 때까지 일본에 살고 있던 한국인은 주로 유학생과 단기노동자들이었다. 단기노동자들은 탄광이나 철도 부설 공사 등에서 일을 했다. 재일한국인의 수는 1910년대부터 늘어나기 시작해 1911년 말에는 약 2500명 정도였지만, 조선총독부의 토지 조사 사업에 의한 농지 수탈과 제1차 세계대전 후 일본 경제 급성장에 따른 노동력 수요 증대로 일본으로 건너오는 사람들이 늘었다.
1920년대에 들어 일본 도항자는 더욱 증가해 1920년에는 3만 명을 넘었고 1930년대 말의 한국인의 일본 체재 인구는 30만 명을 상회했다고 한다. 1920년대에 들어와 도쿄·오사카와 같은 대도시의 하천부지 등에 한국인이 집단 거주하는 지역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다수는 일용직의 육체노동이나 직공, 폐품 회수업자 등이었는데, 볼트나 나사 등의 금속제조와 고무가공 등의 가내공업적 규모의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또한 한국인의 집단 거주 지역에는 한국 식당과 식재료점, 한국의 의료, 잡화점 등도 등장했다.
당시 일어났던 큰 사건 하나가 간토(関東) 대지진이다. 1923년 9월1일 간토 지역에 진도 7.9의 대지진이 일어났다고 큰 혼란 속에 한국인들에 대한 집단 린치, 대량 학살이 발생한다.
일본의 중국 침략 본격화로 국가총동원법(1938년)과 국민징용령(1939년)에 따라 일본 살이를 하게 된 한국인들도 늘었다. 1945년 일본 체류 한국인은 20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망 후 끌려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140만명 이상이 귀국하지만, 재산과 물품 반출 제한과 한반도의 불안정한 정치 정세 등으로 귀국하지 못하는 사람이 늘면서 1946년 말에 집단 귀국은 종료된다. 잔류 재일한국인들은 해외에서 귀국한 다수의 일본인들과 군수산업 중단 등에 의해 노동시장에서 퇴출되면서 일용직 노동, 암시장, 막걸리 제조 등으로 생활을 연명해 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재류동포의 생활 안정 등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재일본조선인연맹(在日本朝鮮人聯盟)이 조직(1945년)되고, 일본 각지에서 조선학교를 설립해 자녀들에게 한국어와 문화·역사를 가르쳤다.
그 이후 역사 역시 힘겹기는 마찬가지였다.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를 문제 삼아 1948년 3월에 조선학교에 대한 폐쇄 명령이 내려졌고, 조선학교 폐쇄에 대항해 재일한국인은 민족교육을 지키는 운동을 전개했다(阪神敎育鬪爭‧한신교육투쟁).
교토국제학원은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학교 중 하나다. 교토에서 삶을 버텨낸 재일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은 하지 않는 가장 험한 일을 했다. 그중 하나가 기모노를 만드는 옷감에 손으로 무늬를 넣는 보카싱 작업이다. 제대로 취업하지 못해 경계인으로 예술활동을 하는 작가도 있다.
학생수 160명(중학생 포함)의 작은 학교를 유지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
줄어드는 학생 수를 늘리기 위해 한국계가 아니어도 입학할 수 있게 벽을 허물었고, 1999년 에는 야구부를 창단한다. 현재는 전교생 중 야구부원만 60명일 정도로 특화했다. 지역 작은 학교로 살아남기 위한 선택은 분명 새로 길을 내야 하는 작업이었지만, 또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지만 역사가 됐다.
'동해바다 건너서 야마도(大和) 땅은/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아침 저녁 몸과 덕 닦는 우리의/정다운 보금자리 한국의 학원'
이날 교토는 물론 도쿄, 오사카 등 일본 각지에서 재일동포 1000여명이 전세버스 등을 타고 교토국제고 경기를 보러 고시엔 구장에 모였다. 고시엔 전통에 따라 1회가 끝나고 두 학교의 교가가 울려 퍼졌고 경기 뒤에는 승리팀의 교가로 다시 한번 교토국제고의 교가가 흘렀다. 우리말 교가가 <엔에이치케이> 방송을 통해 일본 전역으로 이날 두차례 생중계됐다.
고시엔은 일본 챔프류 만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끈질긴 노력 끝에 지역 예선을 통과하고 꿈의 구장에 서는 과정과 끝내 우승을 차지하는 과정에 ‘땀은 거짓말 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녹여낸다.
고시엔 대회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4년 갑자년에 처음 개장해 갑자(甲子)를 일본식으로 읽은 ‘고시(甲子)’와 장소를 뜻하는 ‘원(園, 일본어 음독 ‘엔’)’이 합쳐져 고시엔이라는 이름이 됐다. 고시엔 구장에서 열리는 고교야구대회는 봄과 여름에 한 번씩 있는데, 직전 해의 추계대회 성적과 ‘21세기 전형’ 등 특별 전형으로 대진이 짜이는 봄 대회와 달리 여름 대회는 일본 국내 47개 도도부현에서 토너먼트로 선출된 단 한 팀씩만 출전할 수 있다. 그리고 각 현에서 단 한 팀에만 출전권이 쥐어지는 여름 대회가, ‘고시엔’이다.
올해는 일본 전역 3715개 학교(3441개 팀)가 참가해 49개 학교가 본선에 올랐다. 교토국제고는 앞서 2021년 처음 여름 고시엔 본선에 진출해 4강에 올랐으나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2022년 여름 고시엔에도 본선에 나갔으나 1차전에서 석패했고, 지난해는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최근 성적만 보면 강팀이 분명하지만 시작은 미약했다. 1999년 일본 학교가 아닌 외국인 학교로는 처음 고교야구 지역 대회 중 하나인 교토대회에 출전했지만 단 한 점도 따지 못한 채, 무려 34점을 내주며 대패했다.
당시 상대가 전년도 전국 대회 우승팀인 교토세이쇼고였기도 했지만, 제대로 야구를 배운 선수가 선발투수 한명에 불과했던 교토국제고의 현실이기도 했다.
제대로 된 운동장도 확보할 수가 없어 길이가 70m 정도에 불과한 작은 운동장에서 훈련을 해야 했다. 정식 훈련을 위해서 다른 학교 운동장을 빌려서 운동을 해야 할 만큼 환경도 열악했다. 이대로라면 그냥 포기해도 될 일이었다. 아니 그만하라는 엄청난 잔소리를 들을 만도 했다.
이런 교토국제고 야구부가 강자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데는 사람이 있었다.
고마키 감독이 팀을 맡아 10년 이상 바닥을 탄탄하게 다져온 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99년 교토대회 때 교토국제고에 0-34 패배 아픔을 안긴 당시 교토세이쇼고 선수였던 고마키 감독은 취업 후 취미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2008년 24살 나이로 교토국제고 야구부 감독을 맡았다.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는 결정은 그냥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환경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덕분에 기초를 탄탄히 쌓는 기본에 충실한 야구가 가능해졌다. 선수 선발 때도 실력보다 성실에 더 많은 점수를 할애한다. 야구부가 자리를 잡자 좋은 선수들이 모였고, 상승효과를 발휘하면서 성적이 나기 시작했고 오늘에 이르렀다.
말하지만, 그냥 이뤄지는 것은 없다. 큰 자본만 확보하면 될 것이란 건 생각에 불과하다. 교토국제고의 선전에서 읽어야 할 것은 그래서 여러개다. 작은 학교를 살리기 위해, 소멸할지 모른다는 지역을 지키기 위한 선택지는 많지 않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거창하고 잘 나가는 것이 아니라 착실히 기초를 쌓고 어려운 조건을 필요한 환경으로 조정해 성장하는 것이 마지막에 빛난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진심인 ‘사람’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답도 있다.
일본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NHK를 통해 한국어 교가가 불렸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뭉클한 일이지만 그 뒤에 더한 무엇이 있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